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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남면

중방마을 전경 중방마을
율평마을 전경 율평마을
요전마을 전경 요전마을
수열마을 전경 수열마을
새올마을 전경 새올마을
덕곡마을 전경 덕곡마을
난평마을 전경 난평마을
기산마을 전경 기산마을

가곡리

곡리(谷里)마을

곡리(谷里): 원곡(元谷)이라는 이름은 깊은 골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골말의 한자이다. 계남면지에는 골담이라 하였다.

마을의 풍수는 섬다리가 있는 곳(물이 귀했음)이 배혈이라 하여 마을이 배가 항해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까끄말(까끔말): 대밭골 북쪽에 있는 마을

다락산: 산에 양판서의 묘가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라는데, 그 선인이 다락에 앉아서 글을 읽는 것 같다 함.

대밭골(竹田): 가장 따뜻한 지역이라 내동에서는 가장 먼저 마을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삿갓배미: 여름날 주인 선비가 장에 다녀오다가 모내기를 마친 자기 논의 다랭이 수를 세고 있는데 몇 번을 세도 한 다랭이가 부족하여 결국은 포기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벗어놓은 삿갓을 쓰려고 들고 보니 그 밑에서 한 다랭이 논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묵어있지만 8마지기가 68 다랑어였다고 함.

질골: 가곡리 산64번지 월령이 텃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이 여자의 질을 닮아 붙여진 이름으로 여자에게는 좋지 않고, 남자에게는 명당으로 알려졌음. 남자 매장시 엎어 묻어야 발복한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통주골재: 통죽골에서 신전리 음신으로 가는 재

문턱바우: 장안산 문턱바우가 있는데(지소골 날망 쯤) 밤에 호랑이가 사람이 이 문턱바우에서 만나면 사람도 호랑이도 놀라 자빠졌는데 사람은 한번 놀라면 그 뒤로 식음을 못 하고 죽었다고 한다.

평지(平地)마을

가재: 가치(佳峙), 가잿재, 새미기, 골재(가재에서 장수읍 노곡리 개실로 넘어가는 재의 이름) 등에서 유래되었으며 재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의 형상이 배(般)처럼 보였다고 하는데 쇠바탕 근방에 있는 전나무가 닻이었으며 섬다리 부근이 배의 중앙으로 여김

건치덕골: 신배난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작은 건치덕골

새매기재: 가재에서 덕산으로 넘어가는 재로 현재는 가재 터널 옆 평탄한 곳으로 한영창씨의 낙엽송 숲으로 되어있음.

섬다리(석교평): 고백이를 넘어오는 사람들이 섬다리 부근을 보고 저기가 장수냐? 라고 물었던 지역이다.

칙량금골: 바위 밑에 호랑이 굴이 있다고 전하는데 이 호랑이 굴은 장안리에서 가잿골 까지 연결되어있고 호랑이를 쫓으려고 연기를 피우다가 알아냈다고 한다.

궁양리

궁평(弓坪)마을

궁평: 심한(마한, 진한, 변한) 시기에 궁(宮)터가 있다 하여 궁평(宮坪)이라 불리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풍수학상 장군이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활궁(弓)자, 벌평(坪)자를 써서 궁평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백이(고배기): 고백평(古伯坪)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옛 백제 시대의 장수군인 고(古) 백이군(伯伊郡)으로 볼 수 있고 재궁재, 무룡궁재, 궁뜰을 지역명에 비춘다면 궁양리 부근에 궁터와 관련된 역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댐피골: 쇠바탕에서 서쪽으로 위치하며 겨울철 땔감을 하기 위하여 비로소 댐피골을 지나야만 채취하였다고 전함.

쇠바탕(우장평): 옆 산 형국이 소가 누운 것과 같아서 부쳐진 이름

피야골: 쇠바탕에서 평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6·25전쟁 때 치열한 전투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금란정(금란정):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고 부처진 이름이다.

삼구터: 현재 마을회관 정면에 위치한 곳으로 삼(삼베의원료)일을 하기 공동 작업 터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양지(陽地)마을

굽쟁이뜰: 구평(龜坪)이라고도 하며 양지 서쪽에 잇는 뜰로 자라혈로 되어있어 명당자리인데 묘지를 만들 땐 작살봉을 마주보지않게 약간 방향을 틀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거북구(龜)에서 유래했다고 함.

마무덤골: 끝말(末), 꼬리미(尾)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도 하고, 말 무덤이 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벽남제 물명당: 굴밤나무 옆에 묘지가 하나 있는데 벽남제 물이 만수 시에는 물에 잠기고, 가물 때에는 지상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이므로 사람들은 그 묘지를 물명당이라고 함

화산고개(안박골고개): 양지 서쪽에 화음리 화산으로 가는 고개로 화산 안박골에 닿음으로 안박골 고개라고 한다.

신전리

농원(農園)마을

밭티기고개: 농원북쪽 개젓골과 강정골 사이에 있으며 밥티기형상을 하고있다

싸리재: 서남쪽 고개로 호랑이와 도둑이 꾾어 무서워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웃고개: 노곡리(개실)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덕곡(德谷)마을

덕곡: 옥녀가 고운 비단을 짜듯이 이 마을은 인심 좋고 덕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피밭골: 마을 남쪽 벼농사가 잘되는 논이었으며 벼농사가 되지 않더라도 피 농사를 지어 식량으로 하기도 했다고 한다.

봉화대: 마을 뒷산에 봉화대의 자리가 있었다.

양신(陽薪)마을

양신(陽薪): 섶(薪)이 우거진 마을이란 뜻인데, 실제 풍수에서 누에 혈에 해당하기 때문에 숲을 잘 가꾸었다고 하고 달팽이 꼬리 혈이라 하여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전한다.

비암날: 지픈골 서쪽에 있는 등성이. 산줄기가 뱀과 같이 길며, 이곳에 있는 문화유씨의 묘가 사두혈이라 함.

용쏘(용추): 용숫골 북쪽에 있는 세 층의 반석을 굽이쳐 흐른 물이 떨어져 이루어짐.

음신(陰薪)마을

거문들: 숲이 우거지고 음지라서 검게 보임. 동학혁명 당시 쇠점터에서 필요한 무기를 만들고 이곳에서 싸움하였다고 전한다.

바댓골(해동평, 깊은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마을에서 6~7㎞ 들어가서 ‘느즐머기재에 배를 맸다’라는 말이 전하는바 배 혈 자리라 하여 마을의 안녕을 구하는 풍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암골(비안골): 마을 동쪽 큰 비안골 작은 비안골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화장터로 사용되었고 동물들이 뜯어먹고 다니기도 하였다.

짚막골: 싸리재에서 천천으로 내려가는 깊은 골(깊은막골)

장안리

괴목(槐木)마을

거자정이: 길가에 거자나무(자작나무)가 많이 불렀으며 주변 경치가 좋아 여름철 나무꾼이 땀을 식히며 쉬어가기 좋은 곳이라 한다.

용수깨구랑: 밤나무 정이 밑에 있으며 막걸리를 거르는 용수 막처럼 새겨져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초맛골: 입삭골 북쪽에 있는곳인데 이안에는 와우혈의 명당이 있다고 함.

중고개: 구나뭇들에서 지소골로 넘어가는 고개

원장안(元長安)마을

가르매기: 전에는 막을 치고 목기(木器)를 만들었다고 하며 대부분 화전이나 산판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장안산정 터: 계남면에 사는 선비들이 모여 정자를 짓고 놀았다 하는데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 흔적이 없음.

머드릿골(마두평,馬斗平) 돈핏골 남쪽에 말 머리 형상을 한 골짜기를 말한다.

희평(喜坪)마을

안평전(安坪田): 마을 동북쪽 현재 관광순환도로 가재터널 밑 커브길 옆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

두릅작골: 가재 터널이 있는 골짜기, 안두릅작골과 바깥두릅작골이 있다.

매골: 날의 형상이 매를 닮았다 해서 부쳐진 이름.

조봉골: 새모양을 닮아 부쳐진 이름으로 큰 조봉골과 작은 조봉골로 구분된다.

침곡리

고기(古基)마을

고기마을: 옛터라고 불리었다.

마릿들: 물이 없어서 마릿들이라고 한다.

봉애다리(봉화다리): 원님이 지나다닐 때마다 불(봉화)을 비췄다고 하여 봉화다리라 하기도 하고 법화산에 법화봉수가 있어 봉화 다리라 불렀다고도 한다.

홀애비바우: 바위 밑이 들리면 홀아비가 생긴다고 하여 흑으로 매우기도 하였지만, 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없어졌다. 이 바위는 청동기시대 남방식 고분으로 군산대학에서 발굴하였다.

사곡(梭谷)마을

사곡마을: 풍수설에 의하면 지리적으로 여자가 베를 짜고 있는,직녀형태(織女形態)라고 하며 오래전부터 북실마을로 불리었다.

새까끔: 마을 뒤 서문 씨의 시조 묘가 있는 곳으로 주로 동네의 땔감을 마련하던 산이다.

성짓골: 마을의 정 서쪽 뒤로 있는 골짜기이며 이곳에는 방어산성을 축조할 때 쓰이던 돌무더기가 지금도 남아있다.

서곡천: 성짓골과 느랏골 등 동네 뒤쪽의 크고 작은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들이 서출동류 하며 합쳐져 내려오는 마을 앞 작은 개천을 말한다.

진등재(직능산): 마을 앞쪽의 작은 날에 있는 재로 고기마을 쪽으로 넘나들던 고개

요전(堯田)마을

요전: 우리가 한 동네를 만들어 생애(生涯)가 자적(自適)하고 사람이 순박하고 풍속이 아름다워 태고지풍(太古之風)이 있으니 강구연월(康衢煙月=태평시대 거리모습)에 가깝지 아니한가! 이지명을 따라 요전(堯田)이라 함이 어떠하오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불당골: 동네 위 깊은 골짜기를 말하는데 고려 때 절이 있었다 하여 평평한 곳을 절터 평전이라 한다.

비성골: 동네 앞산 너머에 있는 골

저건너: 기와쪽과 온돌이 나오는 동네 터인데 말무산 일자문성(一字文星) 안(案)은 좋으나 그 밖에는 별로 보잘 게 없다하겠다.

젯들: 장삼들 건너 고기 앞들을 말한다.

침령(砧嶺)마을

방어재: 방어산성과 합미성 사이의 안부에 자리한다. 백두대간의 육십령으로 이어지는 동서방향 교통로가 통과하는 고개로 일찍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소막골: 마을 서쪽으로 소막의 정상에 백제의 마지막 산성인 침령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외지인이 소를 훔쳐 가지 못하도록 몰아넣었던 자리

신그렁(신거랭이): 신그렁의 정상에는 군량미를 저장했다는 합미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지고 성터의 흔적만 남아있다.

청심정 터: 큰 반석위에 있는 청심정 터. 예전에는 청심정 앞까지 물길이 이어져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주춧돌 3개가 남아있다.

호덕리

갈평(葛坪)마을

동평: 깔막재는 구억리가 되고, 추원재와 덕원제가 있는 부근은 갈변지 임.

갓골: 솔의목 밑으로 갓처럼 생긴 골짜기

솔의 목: 하늘소마을 옆, 베짤 때 쓰는 솔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살구정: 남산 밑 뾰족한 산, 하늘소마을 좌측

아리랑고개: 갈평과 구억마을 사이의 고개

옹당샘(도내기 삼): 물이 하도 좋아 문둥병도 나았다고 한다.

구억(九億)마을

개구석: 마을을 가깝게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의 북서쪽 움푹 들어간 곳으로 개오지가 마을의 개를 물고 가던 곳

원소골: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줄기 너머 북동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이다.

원호덕(元好德)마을

원터: 호덕리 어귀에 있는 원집 터, 조선조 때 덕안원(德安院), 홍복원(洪福源)이 있었다 한다.

애장골: 피앗골과 애장골에는 아기들이 죽으면 독을 사용하거나 소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를 애장살이(아장살이)라고 한다.

화양리

난평(卵坪)마을

가매바우: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 바위에 하얀색의 문이 있는데 이끼도 끼지 않고 색도 변하지 않는다.

구렁고개: 북쪽 요전으로 넘어가는 골, 일제 강점기에 큰 사람이 나겠다 하여 축지법을 써 고개를 잘라버렸다고 전한다.

법화재: 천천에서 소를 몰고 장계장으로 넘나든 고개 요전, 봉애다리는 봉(鳳) 또는 봉화를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솔무(솔뫼, 송산): 요전마을로 넘어가는 골에 있는 산으로 소나무가 많고 서편제 유파로 유명한 송만갑 씨가 이곳에서 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진재: 문화류씨의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 난평리 남쪽에서 화음리 소재지로 뻗은 등성이

명동(明洞)마을

흠골: 흠을 판 물대(흠대, 6·25 때까지 흠대로 농사를 지었다)로 이논, 저 논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었다 해서 흠골이라 한다.

홈 통명을 써(掵洞)이라 하기도 하며, 해가 뜨면 가장 먼저 뜨고 제일 밝은 곳의 터의 홍골이라 하여 明洞이라 했다는 두가지 설이 있지만, 明洞은 일제 강점기에 바뀌었다고 한다.

사두혈: 지형이 뱀의 머리 형상처럼 생긴 터, 뱀이 좋아하는 물(울바)이 있으며 사두혈과 2~30m 전방에 섬과 같은 곳이 있는데 이곳을 개구리 봉이라 하여 명당이다.

성주골: 성주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천천면 춘동(봉골)하고 연결된다.

중방(中方)마을

중방(中方): 중방마을을 원래 골말골이라고도 했다.

마릿들: 도리정 옆의 물이 없어 모를 심기 어려운 들이란 말이 있고 말을 맨 자리(말 평)라는 뜻이 있다.

송계정터: 법화산

화음리

기산(箕山)마을

삼밭골: 마을위 고정, 수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엔 삼베의 원료가 되는 삼을 재배하였다 함.

기산(箕山): 백화산 아래에 있으며 마을 모양이 챙이 혈로서 챙이(키)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예전에는 기산(杞山)이라 쓰기도 했으며 또한 치모(치뫼)라 부르기도 한다.

고정(高亭)마을

도쟁이: 고정 남동쪽에 있는 들로 보건소 뒤, 작은마을이 있었는데 도장동이라고 불렀다.

율리정터: 수열 동쪽에 있는 율리정(栗里亭) 터. 조선조 말엽 처사 송방열이 은거했다고 전함.

조곡(鳥谷)마을

산지골(산제골): 피나무재와 화산마을을 욕골과 사이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이곳에서 산제를 지냈다고 함.

제땡이들: 서당골 아래에 있는 들로 옛날에는 유씨일가가 살았다 전함.

함지골: 정고개와 조리고개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모양이 함지(다리가 없는 밥상의 일종)와 닮아서 부쳐진 이름이라 함.

한거(漢巨)마을

한거(漢巨): 큰 거리의 의미

화산(花山)마을

화산(花山): 충주박씨 집성 마을이며 도쟁이, 토시미, 아랫담, 윗담, 서당, 지앙골, 새재 등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산천들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가마동: 양씨 부자가 살면서 지나가는 과객들에게 가마솥을 걸어 놓고 음식을 장만하여 주며 요를 내주어 묵어가게 했다.

떼밭양지: 백화산 남쪽에 솔징이 앞쪽에 있는 양지바르며 평평한 산으로 이곳에는 떼(돗자리 원료)가 많아 붙여진 이름.

서방쏘: 신행길에 가던 신혼부부가 이곳에 병풍을 떨어트렸다 하며 옆 벼랑에 백화담(白樺潭)이란 석 자가 새겨져 있음

솔징이: 큰 웃돌 작은 웃돌 관문으로 나무나 풀을 해오다가 맨 처음 쉬는 곳으로 참나무 숲이 있는 곳

안락재: 화산동쪽 아래에 있는 조선조 중종 때 습독관 안재(安齋) 박지견(朴枝堅)과 만호(晩娛) 임천(林泉)의 재실.

욕골(요골): 조곡(새울) 사람들은 미역 골이라 부르며 화산 사람들은 욕(浴)골로 부르고 있어 목욕과 관계가 있다고도 함.

토시미: 함적골 서쪽에 잇는 골짜기로 한자로는 토심(吐心) 그곳에는 남원양씨 제실이 있는데 그분 이름이 토심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