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s

01

2덕

수절신 백장(1342~1415) 이미지
수절신 백장(1342~1415) 이미지

수절신 백장(1342~1415)

장수군 장계면 장무로 495-14

수절신 백장 (守節臣 白莊) • 백장선생은 고려 공민왕조에서 대제학(大提學)의 높은 벼슬에 있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반정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폐문불출 성리학(性理學)을 편찬하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분으로 조선건국 초 동요된 민심을 수습할 길이 없던 태조 이성계 및 태종 이방원은 명관(名官)정신재(靜愼齋) 백장선생을 불러들이게 하였으나 출사를 불응하자 이곳 장수 땅에 유배되어 1418(태종18년)생을 마쳤다.

방촌황희(1363~1452) 이미지
방촌황희(1363~1452) 이미지

방촌황희(1363~1452)

장수군 장수읍 양선길33-6

방촌황희(尨村黃喜) 선생은 정승의 직위에 24년간 계시면서 19년을 영의정(領議政)으로 봉직(奉職)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로서 이도(吏道)의 귀감이시고 중용(中庸)의 도를 실천하신 명현상으로서 만인의 숭앙을 받는 분으로 한때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출에 반대하여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月岡里)로 유배(流配)당하면서도 곧은 의지를 끝까지 지켰다.

역사문화탐방

창계서원장수군 장수읍 양선길 33-6

방촌공원장수군 장수읍 방촌길 9

노하숲장수군 장수읍 노하리 384

02

3절

순의리 백씨 이미지
순의리 백씨 이미지

순의리 백씨

장수군 천천면 장자울로 4(타루비)

조선 숙종 4년(1678) 당시 장수 현감 조종면이 전주 감영에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천천면 장척마을 앞 바위 비탈을 지나는데, 길가 숲속에서 졸고 있던 꿩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놀라는 바람에 무심코 지나가던 조현감의 말이 놀라 한쪽 발을 실족, 절벽 아래의 배리소에 빠져 급류에 휩쓸려 현감이 목숨을 잃게 되자 주인을 잃은 백씨는 자기가 잘못하여 현감이 죽었다고 통곡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원한의 꿩과 말, 그리고 ‘타루’ 두 자를 바위벽에 그려 놓고 자기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다. 그 후 1802년 장수 현감 최수형이 주인에 대한 충성스러운 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현지에 비를 세우고 타루비라 하였다.

충복 정경손 이미지
충복 정경손 이미지

충복 정경손

장수군 장수읍 향교길 31-14(장수향교) • 063-353-2540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향교내의 문묘(文廟)를 지키고 있었는데, 왜적(倭賊)의 한 부대가 이곳 장수지역에 침입하여 문묘(文廟)에까지 이르자, 문을 굳게 닫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하기를, “만약 문에 들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들라”하였다. 이러한 그의 늠름하고 당당한 태도에 감복한 왜적들은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 :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이라 쓴 쪽지를 남기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로 인해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으며, 대부분 불에 타버린 다른 지역의 향교들에 비해 이곳만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의암 주논개(1574~1593) 이미지
의암 주논개(1574~1593) 이미지

의암 주논개(1574~1593)

장수군 장수읍 논개사당길 41 • 063-350-1637

논개는 이름, 호는 의암, 성은 주씨.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인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가문은 대대로 학덕이 높은 훈장 집이고 동민의 존경을 받았던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논개라는 이름은 아버지 신안 주씨(新安 朱氏) 주달문(朱達文)이 사주를 보고 지었던 이름인데 갑술년(甲戌年) 갑술월(甲戌月) 갑술일(甲戌日) 즉 개해, 개일, 개시에 태어났다고 해서 논개라는 이름을 지었고 역신도 귀한 딸을 샘하지 말라는 애탄 부모의 소원이 담긴 이름이다. 화목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논개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갈 곳이 없어진 논개와 어머니는 당시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배려로 장수 현청 관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관아에서는 최경회 현감의 부인이 나주(羅州)김씨한테 보살핌을 받아 충효열(忠孝烈)의 도리의 가르침도 받았다고 하며 김씨 부인이 사망 후 최경회가 담양 부사로 재직할 때 부부의 예를 올렸다. 세월 흐르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되자 모친상 상중이었던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의병들이 모집하고 500여 명의 정예부대 골자(鶻字)부대를 편성하여 무주 우지치전투 대승을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1차 진주성 전투승리에 이끌게 된 데에 큰 공을 세워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논개도 또한 남편의 뒤를 따라 진주성으로 향했다. 6월19일에 왜군이 10만여 대군으로 침공하여 11일간의 전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이 사망되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남편이 순국한 후 논개는 남편의 나라를 지키자고 하는 뜻을 따라 기생으로 위장해서 촉석루에서 열린 일본군의 승전잔치에 들어가 왜장(倭將)케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서 촉석루 아래 남강에 있는 바위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 순국하였다. 그 후 논개가 투신한 바위에 의암(義巖)라는 글자가 새겨지고 바위와 논개를 동일시하여 논개의 호가 의암(義巖)로 되었다.

논개 생가 : 장수군 장계면 의암로 558
생가 문의처 : 063-352-2550, 350-2583

03

5의

문태서 의병대장 이미지
문태서 의병대장 이미지

문태서 의병대장

장수군 계북면 건재길 7

을사늑약이 조인되자 분기하여 의병 300여 명을 일으켜 덕유산을 중심으로 일제와 싸웠으며, 이원역 및 장수헌병대 를 습격하는 등 5백여 싸움에 많은 왜병을 사살하였으나 끝내 체포되어 경성형무소에서 34세로 옥사하였다.

박춘실 의병대장 이미지
박춘실 의병대장 이미지

박춘실 의병대장

장수군 계북면 건재길 7

을사보호조약이 조인되자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토옥동계곡을 근거지로 장수군 일원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왜병에 체포 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 수차례 탈옥을 시도, 독립군 일백여 명을 탈옥시키고 본인은 현장에서 자결하였다.

전해산 의병대장 이미지

전해산 의병대장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성암길 92 • 전해산기념관 063-352-3373 (월,화 휴무)

전해산 대동의병장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대동창의단을 조직 하여 순창, 고창, 정읍, 함평, 나주, 영광 등지에서 71회 전투에서 수백명의 왜병을 살상하고 일시 귀향 중 왜병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910년 7월 19일 31세를 끝으로 옥사하였다. 그 해 9월 8일 시신이 번암면 원촌마을 생가로 운구되자 부인 김해김씨도 자결했다. 그 후 장수유림에서는 의사 전해산 추모비를 세웠다.

정인승 박사 이미지
정인승 박사 이미지

정인승 박사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19 • 정인승박사 기념관 063-352-3077 (월,화 휴무)

정인승(鄭寅昇) 박사는 29세인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전북고창고등학교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인해 한글 교육을 못하게 되자 1935년 사직했다.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큰사전] 편집주간을 맡았던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光復)과 함께 풀려난 그는 [큰사전] 편찬에 혼신의 힘을 쏟아 1957년 10월 9일 한글날에 완성시킴으로서 우리말의 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이후 전북대학교 총장과 학술원 회원, 한글학회 고문 등을 역임했고 건국공로 훈장, 국민훈장(國民勳章) 모란장을 받았다.

백용성 조사 이미지
백용성 조사 이미지

백용성 조사

장수군 번암면 죽림2길31(죽림정사) • 063-353-0109

백용성 조사는 1864년 호남정맥의 종산인 장안산 남쪽 자락인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 남원의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하였으나 부모의 극구 말류로 귀가하였다가 16세에 다시 출가해 해인사에서 불문에 입문했다. 그 후 전국과 중국의 사찰을 돌며 수행하였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로 활약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法統繼承)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저술에 전력을 다하였다.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하였으며, 1922년 중국 연길에 대각교당(大覺敎當)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0년 2월 24일 나이 77세, 법랍 61세에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