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읍
장수리
교촌(校村)마을
관주산: 관주산은 장수읍의 주산(主山)으로 마을의 배산에(背山) 위치하는데 주관(主官)터 위에 있는 산인 까닭에 관주산이라 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나매깃들: 교촌 상수멍거리 노고쪽 양지들이며 내매깃들, 나목들 이라고도 한다.
내맥양지: 도깨비 바위 근처 나매깃들 주변 양지를 말하는데 볕이 잘 들고 따뜻해서 겨울에 눈이 오면 제일 먼저 녹는 곳이라고 한다.
관뒤들: 관주산 서쪽 들로 교촌, 준비, 북동에 걸쳐 있는 지역을 말하며 관대들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관주산 뒤의 들이라서 관뒤들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고, 관아 뒤의 들이라서 관뒤들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다.
벼룩코뱅이: 양수간 바위가 장수제방(長水堤防)의 근원(根源)이 되는데 이 바위가 있는 곳을 벼룩코뱅이라 한다.
영단거리: 장수초등학교 정문부터 동쪽으로 교촌교까지 거리를 영단거리라고 한다. 과거에 장수초등학교 정문 앞에 ‘영단방앗간’이 있었는데 그 길을 영단거리라 하였으나 지금은 행교길이라 부른다.
관아터(官衙터), 길청터(질청터), 문류터(門樓터): 현재 장수군청 자리에 조선시대 장수현청과 관아, 그리고 아전들이 사무를 보던 길청터가 있었다고 전하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남산교: 장수군청 정문에서 아건너로 넘어갈 수 있게 지은 다리이다.
객사터(客舍터): 장수리에 있는 현감이 주둔하던 옛 장수현 객사의 터이다.
남동(南洞)마을
당고개: 장수읍내에서 남산(南山)을 통해 논개사당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이 당고개는 웃당고개와 아랫당고개로 나뉘는데 웃당고개는 당고개 동쪽 충혼탑쪽으로 예전에는 이곳에서 두산리(말무)로 넘어가는 말무길이라고도 불렀다. 당고개는 장수교회쪽으로 올라가는 고개를 일컫는다.
북동마을
장수천: 북동마을 뒤쪽 사창들을 지나는 천으로 노곡천과 동촌천이 교촌에서 합수하여 중동과 남동 사이를 흐르다가 하비를 돌아 양수교에서 송천천과 합수되어 북동 뒤를 흘러 노하리로 흘러간다.
사창들: 옛날 황무지에 뽕나무 밭이 무성하여 뽕나무밭들로 칭하여 오다가 사창들로 칭하게 되었다.
준비마을
핑계덤: 현재 중학교 정문부터 남쪽으로 교육청, 소방서 쪽이 예전에 들(관뒤들)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평지동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마을 주민들은 핑곗동, 핑계동으로 부르기도 하나 지금은 연세가 지극한 어르신들과 40~50대 주민들만 이 지명을 기억할 뿐이다.
옥거리: 교육청 앞 소방서와 옛 한전 건물이 있었던 지역과 그 맞은편 산림조합 옆 골목길을 옥(獄)거리라고 하며 이곳에 감옥이 있었다 한다.
호비정거리: 의암 수명비의 처음 위치는 장수읍 장수리 277번지 이의종의 집터였다. 예부터 이곳의 지명을 호비정(護碑亭)거리라 하였는데 호비정이란 비를 보호해야 된다고 해서 지명이라 하니 이 고장 사람들이 의명 수명비를 얼마나 아끼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고 하겠다. 현재의 호비로를 말한다.
중동마을
방촌공원: 장수에서 태어난 방촌 황희 정승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아래아건너: 교촌에서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길를 중심으로 아건너의 동쪽은 웃아건너라 하여 교촌, 서쪽은 아래아건라하여 준비에 속했는데 1989년 행정구역 개편시 중동마을로 구획되어졌다.
아건교: 장수교회 앞에 있는 다리로 2004년도에 증개축하였다. 증개축 전에는 지금보다 동편에 치우쳐 있었는데 새로 지으면서 다리 폭을 넓히고 장수교회 앞으로 바로 연결해 두었다.
하비마을
도수장거리(屠獸場거리): 도살장이 있던 마을끝 양수문 근처 거리를 말하며 지금은 없어졌다.
아래아건너: 교촌에서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길를 중심으로 아건너의 동쪽은 웃아건너라 하여 교촌, 서쪽은 아래아건라하여 준비에 속했는데 1989년 행정구역 개편시 중동마을로 구획되어졌다.
삼굿곳: 예로부터 하비마을 도수장거리보다 더 서쪽, 하류천(양수교위)에 삼(麻)을 삶아 길쌈을 했던 곳으로 삼굿(麻굿=삼구덩이)이 많다하여 삼굿(장소)이라 하였다.
아건교: 장수교회 앞에 있는 다리로 2004년도에 증개축하였다. 증개축 전에는 지금보다 동편에 치우쳐 있었는데 새로 지으면서 다리 폭을 넓히고 장수교회 앞으로 바로 연결해 두었다.
개정리
개정마을
사두봉(蛇頭峰): 원개정 뒤 동쪽에 위치하는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뒷산으로 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마음의 심지를 박은 산이라고 말한다. 산줄기가 뱀 머리 같으며 뱀이 전진하며 올라가는 형태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며 산 능선의 굽이굽이가 20개가 넘는다.
산보래기: 개정마을 앞산으로 산의 한부분이 들 쪽으로 튀어나와 마을에서 잘 보인다 하여 사투리로 산 보래기로 불려진 지명이다.
진천암(眞泉岩): 마을에서 남서쪽에 위치하며 개정마을 앞에 있다. 항시 찬물이 나는 곳으로 옛날 우물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며 주민들은 참샘이라 칭한다.
도룡골(도룡놀골): 개정마을 남동쪽의 마을 위에 위치한 골짝으로 옛날에는 도룡농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하여 지금도 도룡농골이라 한다.
석이바우(바위): 원 개정 동남쪽에서 있는 큰 바위이며 석이를 땃었다고 전하여 온다.
호랭이 굴: 석이바우 남쪽 산 중턱에 있는 바위굴로 호랑이가 새끼를 치고 살았다고 전하여 온다.
방어산성(防禦山城): 개정리 도모동 정상에 있다. 최전방이 전망대인 듯하며 100여평의 넓이로 축성한 석성(石城)이다.
신남쟁이 들: 마을 앞 남쪽으로 펼쳐진 들
마을 앞 들: 19번이 국도인 장수로 건너편 들을 말한다.
닫더우 들: 마을 앞 도로 지나 하천 건너 서편으로 용계마을 앞들을 말한다.
다리건리 들: 13번 국도가 연결되는 곳에 하천이 내려 가고 하천을 연결하는 교량이 있는데 이 일대를 다리거리 들이라 한다.
농원마을
도무지골 저수지:마을 동남쪽에 계곡으로 1km지점에 위치하며 개정리와 십진번덕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주지이다.
십진번덕(습진번덕)논:번덕말 북쪽에 있는 논으로 전에 구영록(具永綠)이 진놀이를 하였다한다. 농원 주위의 들이 대부분 십진번득들이다.
양지반:마을 동쪽 양지산 기슭에 자리 잡은 6가구를 말한다.
배골바위:도무지골 뒷 골짝 상봉에 있으며 높이가 약 20cm 되는 바위로 옛날에 바위에 배를 매어 놓았다는 전설과 함께 배골이 바위라 부른다.
호랭이굴:동남쪽에 있으며 석이바우 남쪽산 중턱에 있는 바위굴로 호랑이가 새끼를 치고 살았다한다.
와동마을
매봉(일명 사두봉):와동마을 남동쪽의 뒷산이며 매를 유인하여 사냥했던 산이라 칭한다.사냥꾼이 비둘기를 그물에 앉고 매를 유인하여 잡아서 그 매를 사냥기술을 습득시켜 사냥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배 고리바위:마을 동쪽에 위치하며, 도모지골 안에 있는 바위이다. 옛적에 이곳이 바다였으며 배가 정박할 때 이 바위에 밧줄을 묶는 고리로 사용했다고 한다. 바위에는 지금도 고리구명 형태가 있으며 배 고리 바위라 부른다.
도모지골:마을 동쪽에 위치하며, 개정제 위의 골짜기로 유난히 돌이 많아 돌모집골짝이라고도 했으며, 돌모집골이 도모지골로 불려졌다.
새정잇들(사정평):질골 서쪽에 있는 들이며 예전에 활을 쏘던 활터가 있었다한다.
하평마을
삼봉: 마을 남쪽에 위치한다. 용두마을은 장수제재소 뒤에 이쓴 나지막한 언덕과 같은 산봉우리 3개를 일컬어 삼봉이라 불렀다.
번덕천: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천이다.
개안들: 서쪽에 위치하며 들이 상당히 큰 들로 타관산 앞들을 말한다.
뒷번득: 북쪽에 있는 들이며 마을 뒤쪽 농원마을 앞들을 말한다.
와동들: 하평 남쪽에 있는 들이다.
번덕말(마을): 질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번덕으로 되었다.
노곡리
대리(大里)마을
대리마을은 원래 큰몰이라고 불리었는데 큰몰이라 함은 노곡리 전체 6개 마을중 제일 큰 마을라는 뜻이다. 그런던 중 1972년 1월 1일 행정조직 개편시 그 뜻을 따라 한자어 대리(大里)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각지전골:대리마을 동남쪽에 1,500m 지점에 위치한다. 해발 700m쯤 되며 이 절을 지키는 중이 남자 중이 아니고 처녀중이 이 절을 지키고 있었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며 과거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옛날 각시절이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이 망하였다고 한다.
맹강골: 가재와 깍지골 사이의 골짜기이다. 옛날에 산이 무너져 노루 바우의 돌들이 굴러 내려와 쌓여 만들어진 골짜기라 하여 이를 사투리로 ‘맹글어진 골짜기’ 맹강골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다.
비무덤: 대리 동쪽, 가잿재 좌측에 있는 골짜기로, 비를 묻은 곳이라하여 지언진 이름이다.
제린골 :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사람이 올라가기 어려울 만큼 산이 가파르며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제린골이라고도 불린다.
탑골들: 대리 위 동쪽에 있는 들이다. 들에 탑처럼 생간 돌무덤기가 있는데 그 때문에 유래된 지명이다.
딱밭 : 대리 동쪽 가잿재와 비무덤 사이에 있는 밭으로 옛날에 딱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육판거리: 대리 동쪽, 가잿재와 담안이 쪽의 두 골 물이 합수되는 곳에 있는 거리이다. 초기의 정착터로 믄 정자나무가 서 있었으며 나무 밑에서 윶놀이를 하고 놀았었다 하여 이름지어졌다 한다.
각시바우: 병풍처럼 들러있는 안에 두 개의 바위가 서 있는데 그 모양이 신랑과 각시가 신방을 차린 것과 같다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멍석(덕석)바우: 가재골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 생김새가 멍석같이 넓고 평평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선바우: 옛날에 바위에 배를 매었던 곳이라 하여 선바위라고 전해지며 주민들은 배바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담안이: 대리쪽 마을 이름으로 예전에 마을을 둘러쌓은 돌담이 있었고 그 안에 서너집이 살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딱밭시암: 대리 동쪽 가잿재와 비무덤 사이 딱밭에 있으며 땅에서 솟아나는 물맛 좋은 샘을 말한다. 고려시대 이전에 어떤 스님이 그 물을 깍지골 절터로 올라간 뒤로 아픈 사람이 그 물을 먹고 병이 나았다고 하여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 물을 먹기 원했다고 한다.
상중마을
질척골산 : 마을 뒤편 산으로 진턱골이라고도 부른다. 산 중앙부분이 물이 항시 끼어있어 땅이 질척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습기가 많아서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세거리재: 상중마을 당산 동쪽 장안산 쪽으로 2km지점으로 덕산 지실기지와 덕천암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손정자들: 둥리 뒤편 들을 말하며 옛적에 밀양 손씨가 이곳에 정자나무를 심고 그 부근에 기거하면서 농사를 지었다하여 손정자들이라 부른다.
신리마을
개구리봉 :음낭골 주변 산으로 그 형세가 뱀 앞의 개구리 모양이라 개구리봉이라 하였는데 언젠가 방죽이 터져 뱀이 개굴리를 잡아먹는 형상이 되었다고 한다.
딴동무 : 산 한가운데가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솟아 있으며 정확한 그 밑 들을 딴 동무 들이라 부른다
고름장: 신리 뒷산을 말하며 옛날 늙은이나 쇠약한 자를 광중에 버려두었다가 죽은 후 장사지낸 곳이라 하여 고려장골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벼락박골:신리 동쪽에 있으며 원래는 평산이었으나 벼락을 맞고 산사태가 나서 형질변경으로 바위가 솟아났다 한다. 그 후 벼락 피해가 컸다는 뜻으로 벼락박골이라 전해진다.
새청들: 신리마을 뒷들로 나무가 많아서 참새가 유난히 많이 모여들었다 하며 그 피해 또한 컸다 전해진다. 참새가 쪼아 먹은 벼 껍질이 왕겨터미가 되어서 새의 집과 같다는 뜻에서 새청들이라 했다 한다.
삼가동비폭 : 삼가동 폭포, 비악폭포라고도 한다. 산곡의 맑은 물이 수줍은 듯 풀 속을 흘러나와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며 날아 떨어지는 모습이 산 위를 나는듯하다 하여 비악폭포라 하였다.
신촌마을
서당동: 신촌 동쪽 산을 말하며 산 중앙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계속나기 때문에 사생활에 피해가 많아 마을과 먼 거리에 이쓴 골짝에 서당을 지어 공부를 시켰다 하여 이 일대를 서당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락구미 : 담안이 남쪽 있는 골짜기로 담배작골, 미약소가는 길목에 있다. 매우 가파르므로 다락과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담배작골: 예로부터 개간을 많이 했던 곳으로 담배(연초)를 많이 재배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미락소: 마을 동남쪽 1km지점 큰골안 입구에 있는 늪으로 폭포수 밑에 늪이 있으며 주변의 바위가 아름다워 미락소, 또는 미약소라 하였다.
태바우: 마을 동쪽 세거릿재로 가는 길가 폭포 옆에 있는 바위이다. 아이를 원하는 부인이 이 바위 아래에 떡을 해놓고 정성들여 빌고 난 뒤에 돌을 던져서 큰 구멍으로 들어가면 딸을 낳고 들어가기가 힘든 구멍으로 들어가면 아들을 낳게 된다 한다.
하리마을
노루막골산: 옛날 노루들이 분만을 하려고 할 때는 꼭 이곳으로 갔다고 하는데 노루가 많다는 뜻에서 노루막골이라고 전한다.
벌통배기산: 토종벌이 여왕벌을 따라 이동할 때 벌통배기산으로 갔기 때문에 주민들이 꿀을 얻고자 할 때는 이곳에 와서 벌을 쓸어다가 사육했다고 하며 예로부터 벌통을 얻는 곳이라 하여 벌통배기로 불렀다고 한다.
정박까금: 정박까금에서 “까끔”이란 산의 이 지방 사투리로 옛날에 정씨와 박씨의 산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정박까끔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토풀메기: 하리 앞동산 벌통베기 옆이며 지형이 비둘기 형국으로써 비둘기가 갈밭을 향해 내려왔다 하요 지어진 지명이다.
말잔등: 하리마을 앞산으로 산 지형이 말의 안장 형국처럼 능선이 편안하게 내려왔다.
몰무: 하리마을 남쪽에 있는 낮은 산으로 산 아래 말의 무덤이 있어서 말무인데 사투리로 몰무라고 부른다.
음낭골: 하리마을 앞 밤실 부근에 있으며 골짜기가 외지고 음난하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피나무재: 옛날 한 도사가 노곡리를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역적이 나겠다고 하여 고개줄기를 끊었더니 피가 나와 피가 많은 나무재라 하여 피나무재라고 했다 한다.
갈밭양지: 하리 당산 하단부에 있는 들로 갈밭번지, 갈밭들로 불린다. 옛날에는 갈대밭이 있었다고 하는데 앞산에서 기러기 3마리가 이 갈대밭으로 날아오는 형국이라 하여 갈밭들이라 부른다는 말이 있다.
지름박(기름)들:하리 당산 하단부에 위치한 들을 말한다. 기름을 이 지방 사투리로 지름이라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 송진기름을 채취하였다 하여 지름박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터번덕: 지방 사투리로 들을 번덕이라 하는데 하리마을 앞으로 넓은 터를 가진 들이라 하여 터번덕이라 한다고 한다.
소나기번덕(소내기번덕):하리마을 앞 남동쪽, 동촌마을 쪽의 넓은 들로 풀이 무성하여 소 매기가 좋아 생긴 지명이라 하는 말이 있고 농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하여 방죽이 소나기가 와야 물이 채워진다고 하여 쏘나기번덕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다.
몰뭇돌: 하리마을 남쪽에 있는 낮은 산인 몰무 아래에 있는 들이라 한다.
벌통배기: 몰뭇들 동쪽에 있는 들로 토종벌이 여왕벌을 따라 이곳을 통해 이동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꿀을 얻고자 할 때 이 도망 벌을 받아 사육하여 예로부터 벌통을 얻는 곳이라 하여 벌통배기라고 부른다.
나매깃들 : 교촌 상수멍거리와 하리쪽 양지들이며 내매깃들, 나목들 이라고도 한다. 제보자에 의하면 옛날에 주면 마을을 남악리라고 쓴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 남악에 있는 들이라고 하여 ‘남악들’을 발음하다가 나매깃들로 되었다는 말이 있다.
숭청모랭이: 장수읍내에서 개실 길을 따라 노곡리로 들어 오다보면 하리교 앞, 열녀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를 숭청모랭이라고 한다.
몰무덤 : 물무에 있는 큰 무덤이다. 옛날 한 장수가 충성하던 말이 죽자 그곳에 말을 묻었다고 한다.
지름바우: 하리 당산 밑 바위로 지름박들에 있는 바위이다. 노곡리에 비압압루혈이 있는데 그 기러기의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시절나무: 하리마을 중아 도로변 단무지 공장에 있는 느티나무인데 잎이 피는 시기가 해마다 달라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나무의 잎사귀가 많고 적음에 따라 그해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하중마을
질척골산: 마을 북쪽 산으로 진턱골이라고도 부른다. 산 한가운데가 항시 물이 끼어 있어 땅이 질척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습기가 많아서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통싯골: 마을 북쪽에 있는 통시처럼 외지고 음침한 골짜기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퉁소골: 마을 북쪽, 뒷골짝에 있으며 계곡 형태가 퉁소같이 구멍이 드문드문 있다 하며 퉁소골이라 한다.
행깃들: 하중마을 뒤 서쪽 우사 아래쪽 들이다. 영곗들이라고도 하는데 횡곗들의 곡식을 달이 주워 먹고 있고 살쾡이가 이 닭을 잡아먹으려고 겨누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사리들: 마을 바로 뒤 서쪽 들을 말하며 옛날에 이 들의 토질이 좋아 물을 대면 논이요 물을 빼면 밭이라 보리도 많이 갈았다고 한다.이때 보리사리를 많이 해 먹어서 사리들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리란 ‘서리’의 사투리이다.
노하리
노하마을
배난골: 봉강 서쪽 골짜기이다. 예전에 재래종 배(돌배)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통싯골:봉강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형이 통시(변소)처럼 좁고 외졌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성바람: 바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성불암이라고도 한다. 현재 절은 없고 골짜기 어귀에 성불암 터가 있는데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구제가 되지 않자 불을 질러 아예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장골: 앵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도장과 같이 깊숙하고 아늑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늦은모기: 노하리숲 북쪽에 있는 노라리에서 판둔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가파르지 않고 느슨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너삼밭골: 질너머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서 머슴이 베어온 풀에 인삼 잎이 있는 것을 발견한 주인이 다시 갔으나 찾지 못하자 그 인삼이 내 것이 되지 못하고 남의 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서늘고개: 노하에서 천상더미로 가는 고개로 사방이 산으로 되어 있어 고개가 서늘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선우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뻣남쟁이(뻔나무쟁이): 동해방껄 남쪽에 있는 들로 큰 벚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벚나무를 뻔나무라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
신기마을
도장골: 신기마을에서 서쪽, 뒷산으로 올라가면 깊숙한 골짜기가 나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도장굴처럼 움푹하고 깊어서 도장골이라 하였는데 예로부터 도장나무(회양목)가 많아 도장골로 칭하였다고 하는말도 있다.
봉화봉(烽火峯): 변란이 있을 때 변경에서 서울까지 경보를 알릴 때 사용했던 산봉우리기 때문에 봉화봉(烽火峰)이라 칭했다 한다.
서누고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노상 그늘지기 때문에 서늘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말방천(마방천, 馬防川): 샛터보 근처 하천제방으로 통나무를 많이 쌓아 하천이 범람할 때 농경지를 보호했으며 규모가 큰 방천(방천)으로 물이 깊어 말이 빠져죽었다는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왕대마을
양지까끔: 햇볕이 잘 드는 산이라는 뜻으로 ‘까끔’은 산의 사투리이다.
여시데미 골짝: 마을 건너 산골짝을 말하며 옛날에는 여우가 많아 부쳐진 이름이다.
집건네골: 큰골과 천상데미골 사이 골짜기로 마을 건너 골짜기, 집건너 골짜기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도탐거리: 마을 뒤편 마을 숲이 있는 곳을 말하며 옛날 조탑(도탐)길을 일컫는 말이다.
돌아래: 왕대마을 앞 구부러진 곳에 있는 냇가이다. 옛날부터 도로아래 있는 냇가라고 하여 돌아래라고 불렀다고 한다.
큰번덕: 마을 주민들은 뒷번덕, 뛰뜰이라고도 부른다.
판둔마을
목너메: 노릿골재를 넘어가는 길목이라 하여 목너메(목넘어)라고 한다. 이 목너메를 넘어가면 밭이 나오는데 그밭을 목너메라고 하기도 한다.
대판(大板)재: 판둔 뒤 왕여봉이라는 높은 산까지 가자면 넘어야하는 재로 장작용 통나무를 지고 넘나든다 해서 대판재라 칭했다.
노릿골재: 깊숙한 골짜기를 돌아 힘들게 넘어온다는 뜻으로 노릿재라 한다.
칼날봉(칼래봉): 판둔후산(판둔후산)으로 산봉우리가 칼날처럼 날카롭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벌거숭이로 산꼭대기가 어린이들의 미끄럼 놀이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조성되었다.
잿들: 판둔교 입구의 지방도 위쪽(북쪽) 비탈진 들(野)을 말하며 비탈지고 박토였기 때문에 유래된 지명인 듯 하다.
대성리
대성마을
대성마을: 처음 생긴 마을이라 하여 으뜸 원(元)자를 써서 원대성이라 칭하여 왔다. 그 후 대성리 관내에 여러 마을이 형성되면서 ‘元’자가 없어지고 대성리로 되었으나 요즘에도 원대성이라 부른다.
쾌등산: 개등산은 등잔혈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며 이 산에는 화산 바위가 있어 그 화산 바위를 숲으로 막지 않으면 마을이 화재를 당한다하여 숲을 조성하고 있다.
방화들: 비석거리 아래들로 꽃날봉까지이며 예로부터 들꽃이 많이 피고 종류도 다양해 예쁜 산길이었으며 꽃구경을 다니던 길(거리)이었다고 한다.
주막거리: 지나는 나그네나 초군들이 지나다 쉬어가는 주막이 있었다 하여 주막거리라 하게 되었다.
구평마을
구암마을: 구암마을 입구에 흑평(黑坪)들이 있는데 흙이 검고 기름진 들에 흑갈색 돌이 많아서 흑평(黑坪)마을로 불렀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암마을로 편입됨
숯구머리: 산서 방면 지방도로 위 석기공장 터이며 옛날 숯 구덩이가 있었다 하여 그후 숯구머리라고 지명하였다.
개치재: 예전에 장에 가려면 이 길을 지나는데 걸어가다 다리가 아프니 다리 아프지 말라고 돌을 하나씩 던져 쌓인 큰 돌무덤이 성황당이 되었다.
병(甁)골: 구평마을 남쪽에 있으며 골짝의 안쪽은 넓고 입구 쪽은 병(甁)목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대덕마을
금평(錦坪)마을: 원래는 ‘점터’마을이며 토양이 점토(점토)로 형성되어서 질그릇(옹기) 굽는 업이 성행하였다 한다.
웃장송고개: 대덕마을 진입로 윗 고개에 있고 노송이 많아 장승고개라 불렀다.
성재: 금평 동북쪽에서 합미성으로 가는 고개
납작골: 팔공산 원수봉 진입로 골짝이며 지형이 납작하고 골짝이 적어서 생긴 이름이다.
가미재들: 대덕마을 간이버스 휴게소 밑들이다. 예로부터 가마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배정이번덕: 금평 북쪽에 있는 버덩이며 베를 널어놓은 것
솔대기골: 마을 동쪽 고개 길
필덕마을
잔고개: 고개 줄기가 잔잔하다 하여 잔(殘) 고개라 했다 함.
문등골: 샘이 있으며 옛날 나병 환자가 그곳에 와서 샘물을 먹고 가면서 붙여짐.
토골: 팔공산 밑 필덕마을 위 골짝으로 왜정시대부터 광산을 하면서 굴(屈)이 많다 하여 지여짐
도장골: 흥농농장 주변 골짝들로써 광활한 면적이라 하여 장차 곡식을 많이 생산할 것 같아서 지어진 지명이다.
마루들(몰랑들): 오랑골 서남쪽이며 필덕제(堤)밑 골짝들이다.
덕산리
덕산마을
부두재: 땅골 마을에서 번암면 동화리 감배기로 가는 고개이다. 마을 동남간에 위치한 터로 옛적에 부자(富者)터와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며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리려 할 때는 북소리와 소(牛) 울음소리가 났다고 한다.
새작골: 산줄기 형태가 꿩이 날아가는 형태이다.
고래: 덕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원덕산 마을의 옛 이름
당동(堂洞): 원래의 지명은 땅골 이다. 골이 깊고 물이 많으며 토질이 비옥하여 사람이 집을 짓고 살기에 적당하다고 지어짐
범연마을
웬골재: 덕천암 골짜기로써 골짝이 무척이나 길어서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어찌된 골짝이 이렇게 길고 깊다는 뜻에서 ‘웬’이 붙게 되어 웬골재라 불러졌다.
댕백이재(防己): 범연 앞산으로 옛부터 넝쿨이 유독 많고 그중에서도 댕댕이 넝쿨이 특히 많아 붙여진 이름
호랑골재: 땅골 북쪽에서 범연동으로 가는 고개로 땅골에서는 댕백잇재, 범연동에서는 호롱골재라 한다.
어치재: 범연동에서 동쪽 능선을 넘는 재(경남 함양군 백전면으로 가는 지름길)
지석골: 지실가지에서 계남면 장안로 넘어가는 재
가재재: 지실가지에서 서북쪽 노골리로 넘어가는 재
동촌리
동촌마을
무조매기: 동촌 서남쪽 마봉산에 잇는 고개로 두산리로 넘어 가는데 고개의 지형이 새가 춤을 추는 것 같이 되었다 한다.
바랑골: 덕산 구로(舊路) 수양원 밑의 지명
황정골: 고려 말에 장수현감을 지낸 황희 정승의 선친이 그 골짝에서 글을 읽었다 하여 황정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큰골: 골짝 입구는 적으나 안쪽 계곡이 넓다.
참악골: 큰골 건너편 계곡으로 골짝이 험하고 돌밭이었다.
두산리
두산마을
매봉: 지형이 매(鳥) 같아서 지명되었으며 이곳 매봉에는 복지혈(伏地穴)이라는 곳이 있어 명당(明堂)이 많다고 하여 묘지(墓地)가 많다. 복지혈(伏地穴)은 꿩이 매를 보면 힘을 못 쓴다는 뜻으로 이곳에 숲을 조성하여 액을 막아야 한다고 하여 예로부터 나무숲을 우거지게 했다.
말샘: 옛날 구름에 뜬 골(谷) 형국이어서 지어짐. 풍수설에 의하면 운중반룡혈(雲中盤龍穴)이 있다고 한다.
삼박골: 길쌈을 하던 옛날부터 대마를 솥에 삶던 곳이라고 한다.
병목골: 정골 위 골짝이며 병(甁) 모가지 같이 안쪽은 넓고 바깥쪽은 좁다하여 생긴 이름.
동촌고개: 동촌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지금은 논개로라 부른다.
당고개: 두산 북쪽에서 장수읍으로 가는 고개
선창리
양선마을
매봉재: 복골 날망을 매봉재라 한다.
음선마을
싸리재: 장수, 게남면간의 싸리재는 고서(古書)에 대유치(大杻峙)라 칭했다.
섯고개(불당골): 웃데미 남쪽에 있는 고개
피나무재: 싸리재에 있던 재로 도로를 내면서 피나무재의 허리를 자르자 붉은 피가 나왔다고 전한다.
지막골: 싸리재 전경대와 천천면 반월리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짝으로 구설에 의하면 전에 마을 형성 흔적이 잇어 지막洞으로 불러 오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막동이 지막골로 변하여 부른 듯하다.
도장(도장)골: 큰싸리재 동북쪽에 있는 도장처럼 깊고 아득한 골짜기이다. 예로부터 명당이 있어 그곳에 묘(墓)를 쓰면 장군(將軍)이 난다하여 그곳에 묘(墓)를 써야 한다는 뜻에서 도장(倒葬)골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작은싸리재: 천천에서 계남과 장계를 통하는 유일한 지름길이었다.
어둔골: 지막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좁고 깊어서 언제나 어둡다 한다.
송천리
송천마을
도장골: 선바위 밑의 골짜기로 지형이 도장과 같이 깊고 아늑하다고 한다.
도깨비밤나뭇거리: 송천 북쪽 큰길가 모롱이에 있는 거리
너삼박골: 절터골 옆에 있는 골짝 구락마을
동산(洞山) 구락마을 바로 뒷산으로 마을의 정서(情緖)가 담긴 동산
가운뎃고개: 진다리와 구락리 사이에 있는 고개
오리골: 구락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오리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이곳에 묘지(墓地)가 많다.
삼굿거리: 여름철 대마를 쳐서 가마솥에 삶은 장소라 하여 삼굿거리라 하는데 구락 진입로 교량(橋梁) 부근이다.용추마을
떡바위재: 서구리재 꼭지 부근의 신암리와 고종대 갈림길에서 고종대쪽으로 가는 초로(樵路)에 있다. 시루떡처럼 네모로 생긴 바위가 있다.
지방바우 모퉁이: 용추에서 안양을 갈 때 돌아가는 왼쪽 산 끝으로 안양에서는 매산 바위골 끝이다. 안양 마을에서 본 매산 바위를 본떠 불러진 이름인 듯하다.
서구리재(서구리치): 송천 서남쪽에 있는 고개로 쥐 모양으로 생긴 산맥이 9개가 있다 한다.
단평마을: 서구리재를 넘나드는 길손들이 쉬어가는 주막(酒幕)과 술을 파는 아낙들이 많았다. 여인들이 많다보니 붉은색의 저고리단과 웃고름을 연상하여 나그네들이 단(丹)자를 써서 단평(丹坪)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송학골마을
확골: 서구리재 밑으로 펼쳐지는 계곡을 말하며 단평을 소쿠리 안처럼 음푹하다 하여 확골이라고도 부른다.
이교마을
진다리들: 송천 서쪽 다리 건너에 있는데 수렁으로 된 들로 비가 조금만 내려도 땅이 매우 질다고 한다. 풍수설에서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빠지는 금구몰니혈(金龜沒泥穴)이 있다 전한다.
거지고개: 남쪽에 있으며 진다리에서 용추동으로 가는 고개로 양지쪽이므로 거지들이 많이 쉬어갔다고 전한다.
수분마을(물뿌리마을)
뜬봉: 수분 서쪽에 잇는 산으로, 장군대좌혈(將軍大坐穴)의 명당이 있는데, 역적이 날까 두려워 숯을 놓고 불을 질러 그 명당자리를 떴다한다.
모새골: 고무들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운학골 위에 위치하며 골짝에 암반이 깔려있고 물이 낙차한다. 여름철 신경통 등을 치료하기 위해 무릎에 물을 맞는 곳이며 주변 풍치가 좋다. 섬진강 발원지이며 수원이 번암으로 흐른다.
원님골(원골): 수분령 가든 밑 계곡으로 험하다. 옛날 원님이 말을 타고 번암 등지를 행차하면서 경유하던 곳이다. 당시 수분 주막이 많았으며 주민들은 취중에 비아냥댔다고 전한다.
연사동: 모샛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뱀이 잇달아 내려오는 것 같은 지형이라고 한다.
가래터들: 북쪽에 위치하며 가래터에 있는 들로서 구 수분학교 뒤 골짝들이다. 지형이 가래 같고, 곡간 답이고 논둑이 높아 흙을 떠올리는 가래와 연관 있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송계마을
봉우데미: 마을 동쪽에 있으며 송계~개정 간 뒷산으로 옛날 봉화를 피웠다 하여 봉화데미(더미)라 하였다. 일제가 조선의 멸망을 목적으로 쇠말뚝을 꽂았다고 전한다.
버드나무골: 바구리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유지앵소혈이 있다고 전한다. 송계 뒷산 골짝 지명이며 버드나무가 많았다. 꾀꼬리가 버드나무에 둥지를 많이 틀어 풍수지리에 의하면 명당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고사리 번덕: 서쪽에 위치하며 송계 앞 건너들로 옛날부터 고사리가 많아 고사리 번덕이라 불렀으며 고사리번덕과 바구니봉과의 지명이 연계된다.
식천리
식천마을
마치재: 장남제 위에 소재하며 옛날 경상도 주민이 부족식량을 구하기 위해 말을 타고 이 곳을 지나 곡창인 김제를 다녔다고 하여 마치재라 하였다.
장고목재: 식천마을 앞 남쪽 지점 산으로 영(嶺) 중앙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장고모형으로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지명(地名)이다.
산 넘어: 마을 남서쪽 지점에 있으며 마을 앞산을 넘어 다니며 화전(火田)을 일구고 퇴비와 땔감을 채취(採取)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회춘내골: 예로부터 주민들이 회춘을 계속했던 곳으로 회춘내곡(回春內谷)이라 한다. 무제바위가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는 바위에 돼지 피를 바르면 금방 비가 왔다고 전해진다.
짐박골: 사람이 지게에 짐을 지고 서서 있는 형국과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용계리
용계마을
잣고개: 안양 남쪽에서 대성리로 가는 고개 길로 자로 재단한 듯 곧다.
도주막거리: 용계 앞 숲 거리를 말한다. 1980년대까지 이곳에 주막이 있어 도주막이라 불렀으며 요즘에도 주막은 없지만 도주막이라 부른다.
문바위: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위가 마치 대문을 연상시킨다. 때로는 병풍처럼 보이는 바위 위에 소나기가 무성하게 우거져 경관돠 매우 아름답다. 이곳에 있는 바위가 곧 문바위이다.
안양마을
매굴: 안양마을 뮈 물탱크 부근 바위 밑에 굴이 있다. 예로부터 매의 명이 있다 하여 매 굴이다. 천연적인 굴로써 개발가치로 있어 보인다.
쇠바탕 및 서상골 : 북쪽에 위치하며 권정자들 위쪽이며 이곳 또한 구락, 용추에서 온 나무꾼들의 쉼터이다.옛날 소의 질마(짐을 싣는 ∩형 기구)로 땔감과 퇴비 등을 운반하며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활용했다. 권정자에서 소를 타고 쇠바탕까지 올라가서보면 쇠가죽과 마찰되어 엉덩이가 피로 물들었다 하여 당시에는 땔감과 퇴비 채취에 대단히 애로를 느꼈다고 전해진다.
매선(每仙)박골: 안양 마을에서 웃고개 북쪽 백씨산에 위치하며 큰 바위가 안양 쪽을 향하여 앞으로 곧 넘어질 듯 서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가 예로부터 안양마을에서 이 바위 쪽을 향하여 소리치면 그곳에서 대답(산울림)을 한다 하여 사람들은 선녀가 있다고 믿어왔다.그 연유로 날마다 부르면 선녀가 대답한다 하여 “仙”자를 이용하여 매선박골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