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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정향토문화유산
장수읍
선창리누석단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 451-1
선창리 음선마을 입구 길을 사이하고 좌우로 석조탑 한 쌍이 마을을 지키는 촌문장처럼 배치되었는데 좌측 조탑이 할아버지 당산, 우측이 할머니 당산이다. 높이 2.5m 밑 둘레 9.5m인데 20∼41㎝ 크기의 잡석을 원추형으로 쌓았으며 상단의 중앙에 45㎝ 높이의 석주를 꽂았다. 먼저 주 당산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하위 당산인 석조탑으로 내려와 조탑제를 지내는데 이곳에서는 잡귀와 병마를 쫓고 마을의 평온을 비는 각자의 축원을 드린다.
심원정(천연대)
장수군 장수읍 논개사당길 17-4
구분 : 정자
규모 : 앞 3칸, 옆 3칸
구조 : 누각, 사모지붕, 겹처마, 기와집
논개 사당으로 들어가는 길가, 저수지 옆에 있으며, 풍광이 볼만하다. 동향으로 앞 처마, 밑에는 ‘천연대(天淵坮)’, 안쪽에 ‘심원정(尋源亭)’, 남쪽 처마 밑에는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 현판이 걸려있다. 안에는 그 밖에 모두 11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심원정기(記)]는 완산 최병심이 썼으며, [천연대 팔경 원운(八景原韻)]은 남고 유일수가 썼다. 8경은 ‘장판횡교(壯板橫橋), 월곡만하(月谷晩霞), 장포어화(長浦漁火), 송탄귀범(松灘歸帆), 신사모종(新寺暮鍾), 삼고초적(三顧樵笛), 남양춘초(南陽春艸), 왕홍낙조(王興落照)’ 등으로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장수읍과 천천면의 풍경을 들먹인 것이다.
용호정
장수군 장수읍 용계길 6
시대 : 1968년
구분 : 정자
규모 : 앞 2칸, 옆 2칸 (245, 245,x245, 245)
구조 : 팔작 지붕, 겹처마
1968년 용계리 주민에 의해 창건되었다. 마을 앞에 있으며 신무산을 등지고 멀리 서쪽의 팔공산이 마치 자식을 굽어보듯 서 있다. 전면에는 지관산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림같이 흘러가고, 동쪽에는 사두봉과 방어산성이 나란히 서 있다. 수분치(水分峙)에서 발원한 금강 상류의 맑은 물은 옥야(沃野)를 가르듯 북향하여 달려가고 척영(尺嶺)(잣고개)의 급류는 길노래를 부르며 동으로 동으로 흘러가고 있다. 남해 원주선 국도는 남북으로 관통하고 장수 산서간 도로는 용호정을 돌아 잣고개를 향하여 오르고 오른다. 푸른 산과 들을 앞뒤로 한 이 용호정은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의 노랫소리가 멀고 가까운 숲속의 벌레소리 들역을 지나오는 시원스러운 바람소리, 한여름 더운날에는 오가는 길손들이 그치지 않는다.
김씨부인열녀문
장수군 장수읍 동촌리 산 21-4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정려
이 정려는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으로 된 맞배지붕으로 장수읍에서 노곡마을로 가다보면 중간지점 의도로 우측에 있다. 현재 정려 안에는 열녀우승지조성순처숙부인금해 김씨지려라 쓰여진 현판과 도유사의금부도사 정은채가 글을 짓고, 교정유사련산군수 조경식이 글씨를 쓴 정문기가 걸려 있다. 결혼 3일 만에 갑자기 남편이 죽자 주위사람들이 김씨가 손을 끼고 왔기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려 김씨는 그의 시어머니로부터 곤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효성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공경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추하게 하고 머리를 희게 하여 늙은이 행세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김씨의 열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녕 조씨 문중에는 1750년 열녀문을 건립하였으며, 현재 이 정려는 1922년 다시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송천리 누석단
장수군 장수읍 송천리 1338-5
구분 : 누석단
조탑으로도 불리우는 누석단은 마을 입구 좌우에 쌍탑을 조성했으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탑의 정상에 남근석을 세웠다.
산서면
기미3.1운동비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258-1
이 비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개되었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던 것으로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 산서면 사계리에 있던 지금당 생도들이 사계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른 뒤 동화리 장터로 와서 장꾼들과 합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 독립에 뜻을 바친 선열들의 일을 기리기 위해 1983년 면민들이 뜻을 모아 동화리 경노당 옆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장수군민 기념 사업으로 추진 현 위치로 이건하였던 것이다.
연안이씨효열기적비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613
시대 : 1939년
이씨는 광주안씨 효명의 처요, 사간 공의 후손이다 남편이 병이 깊어 약으로 효험이 없자 재목하고 하늘에 빌되 대신하기를 원하고 남편이 배(梨)를 원하니 때인즉 엄동이 었다. 배나무 밑에 가서 기원하다 보니 큰 배 하나가 있는 지라 가지고 돌아와 즙음한 후 1년을 회소하다가 죽으니 사람들이 성감의 소치라 하였다. 이씨의 증손형제가 석정문을 세우고 탁절을 새겼다.
효자이효규지비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331-3
시대 : 1989년
효령대군 보의 후예인 이하규는 평소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리어(鯉魚)를 먹기를 원하니 그때가 추운 겨울이었다. 리어를 구해 드시고 효험이 있어 천년을 마쳤으며 평생을 3일마다 성묘하되 풍우에도 불폐하였다. 도내 유생 20여인이 순상에 고하였으나 당시 국사의 어려움으로 작설을 입지 못하였다. 원래 남원 대산면에서 출생하였으나 후손들이 이 고장에 거주하였기에 이곳에 비를 세웠다.
호룡보루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186
시대 : 1949년
1949년에 건립한 것으로 높이가 8m이다. 여수반란사건이 발생한 후 이 지역에서도 혼란이 계속되자 지방의 치안방패로 세워진 것이다. 호룡보루(堡壘虎龍)는 등록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북 분단 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던 시기에 공산당 세력의 만행으로부터 마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보루이다. 석재를 사용하여 벽체를 축조하였으며 벽태 중간마다 중구를 내었는데 상 중 하단에 각각 4개의 총구를 엇갈리도록 설치하여 사방을 감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향토방위대가 이곳에서 경찰과 함께 지리산 빨치산에 대적해 전투를 승리를 기두는 등 광복 이후 무력 충돌로 치닫던 이념 대결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효열부남양홍씨지려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423-8
시대 : 1982년
홍씨는 경주이씨 가문에 출가하여 늙은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도와 살았으나 불행이 남편이 중병에 눕게 되자 간호는 물론 시부모와 4형제의 자식을 양육하느라 삯품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였다. 남편이 타계하자 때로 고용하여 부모를 모셨다. 주위에서는 효부요, 열녀라는 칭송이 자자 함을 아들이 비를 세워 부인의 덕을 전하고 있다.
쌍효한용인, 용학유적비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423-8
시대 : 1995년
일찍이 부친을 잃고 편모를 효봉하더니 모부인의 병에 상분하여 치료하였으며 대소의 사역을 몸소 처리하여 지혈로 3일을 연명하였다.
광산김씨열행비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642-44
시대 : 1957년
이상준의 부인인 김씨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더니 남편이 병이 들자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허벅지 살을 도려 치료하고 하늘에 빌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니 그때 나이 25세였다. 음식을 입에 대지 아니하고 따라 죽고자하니 부친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예제를 같이하고 교자를 엄중히 하여 조금도 과실이 없게 하였다
창원정씨효열비
장수군 산서면 사상리 127-1
시대 : 1989년
정창룡의 딸로 김인국에게 출가한 후 시부모를 효로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여 남편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힘쓰고 가정을 돌보아 생활을 편안케 하였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창원정인규효행비
주소 :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 215
정헌규(본 昌原 호 松菴)는 평일에 항상 생선으로 부모를 봉양하였고 불행이 부친이 풍병으로 위독함에 지성을 다하고 모친 또한 풍병으로 7년간을 간호함에 정성을 다하여 회춘한 수년 후에 죽으니 이웃이 효자라 칭하고 포상코자 하였으나 절대 사양하였다한다.
반계정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560
시대 : 1909
구조 : 목조, 팔작지붕, 홑처마
현판과 상량문(上樑文) 외에는 편액이 없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지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상량문을 통하여 1909년에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집안에 내려온 「합포가사(合浦家史)」에 가문이 남아있다. 반계(磻溪) 정상규가 지었으며 그의 호를 따서 반계정(盤溪亭)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10그루의 소나무가 정자를 둘러싸고 있고, 일각문 주변 1,130cm의 흙담이 있다. 정면, 측면 2칸으로 평면 390x215cm의 방이 있다. 연등천장구조의 팔작지붕이다. 누마루에 턱이 있는데 갈려나간 보의 흔적이 있어 변경된 구조로 보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자의 뒤편에 아궁이가 있고 우측에 굴뚝이 이다. 丁尙圭(본 昌原 호 盤溪)는 생활이 매우 어려웠으나 남을 돕기를 좋아하고 지조가 있었다. 정자를 개울 위에 짓고 세상을 피해 들어가 살았다고 전해져 있다.
우우정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226
구조 : 목조, 팔작지붕, 홑처마
정협규, 정익규는 유헌 정황선생의 자손이다. 공의 형제가 노년이 되어 서산아래 계곡의 바위위에 정자를 짓고 서로 대하여 훈호하니 사람들이 우우한다 칭하니 이로 인하여 정자이름을 우우라 명하였다.
사동사
장수군 산서면 사창길 35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서원
이 사우는 조선 현종 13년(1847) 창건되었다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전국 사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던 것을 1957년 복설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김해 김씨의 선조 가운데 동창 김준손, 매헌 김기손, 탁영 김일손, 삼족당 김대유, 도연정 김치삼, 만회당 김정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복설하면서 모암 김극일을 추배하고,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점필재 김종직을 추배하고 김극일을 주벽으로 하였다. 현재의 사동사 건물은 1986년 중건하였으며, 사당 3칸 . 강당 5칸,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다.
효자모순지려
장수군 산서면 건지리 386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정려
구조 : 정면1칸,측면1칸, 팔작지붕
이 정려는 1934년 창건되었으나 1980년 화재로 소실되어 1981년 재건한 것이라 한다. 현재의 정려각은 정면 1칸 .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정려각 정면위에는 절강선생지려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이 정려각 안에는 "효자통정대부행좌사간함평모공순지려"라 음각된 비석이 있다. 모순은 자를 순지, 호를 절강이라 하였으며,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려 할 때 강물이 불어 장지로 갈 수가 없자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대곡하니 강물이 갈라져 장지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효자장기하지려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330-2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정려
이 정려는 화강암으로 비각처럼 조성하였다. 비각 안에는 앞면에 효자조봉대부동몽교관장기하지려와 효부영인청주한씨지러라 음각하고 뒷면에 정려기를 음각하였다. 정려기는 종사랑효덕전참봉은 진송재성이 지었다. 장기하 부부는 부모에게 지극한 효행을 하여 정려의 특전을 받게 되었다. 정려를 세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정려기에 기록된 간지는 신축년이다.
효자윤필은지려
장수군 산서면 신창리 28-1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정려
구조 : 정면1칸.측면1칸. 맞배지붕
이 정려의 내부에는 "효자 윤필은지여"라 음각한 비석이 있고 사하진사 노석승이 글을 짓고 경주유학 김장렬이 글씨를 쓴 정문기가 걸려 있다. 이 정려는 정면 1칸 .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1956년 창건된 것이다. 윤필은은 조선조 영조 50년(1774) 태어났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전주이씨열녀문
장수군 산서면 이룡리 100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정려
구조 : 정면1칸.측면1칸 맞배지붕
정려 안에 있는 현판에는 "열녀학생김호처전주이씨지려"라 쓴 글씨 아래 읍행후 성홍집이 쓴 열녀이씨정문기가 새겨져 있다. 이 정려가 세워진 연대는 헌종 12년(1812) 5월이다. 현재의 정문은 정면 1칸 .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거녕산성지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성재길 22-5
시대 : 삼국시대
구분 : 산성지
거녕성은 장수와 남원군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400m 정도 되는 성산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에 속한다. 이 일대는 백제 때 거녕현으로서 신라 때에는 거사물정을 두어 백제 옛 땅의 지방 군제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 성에서 동으로는 장수방면의 합미성과 남으로는 남원 이백면 척문리 산성 그리고 서쪽으로는 순창으로 가는 적산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성벽의 내부벽은 장방형의 깬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높이는 6m 내외이며, 길이는 350m 정도 잔존하고 있다. 무너져 내린 성벽의 주변에는 문설주로 보이는 석재외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다량의 와편이 산재되어 있다.성의 내부에는 곳곳에 여러 기의 민묘와 인근지역 유생들이 모여서 서문을 짓던 팔작지붕으로 된 성음정사 그리고 중앙에는 영월암이 있다.
압곡고인돌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716
시대 : 청동기시대
구분 : 고인돌
용전마을에서 길을 따라 압곡마을로 가다보면 마을 어귀의 논둑에 있다. 개석의 일부는 논 둑에 묻혀 있으며, 개석의 하단에는 지석이 보이며, 흙으로 채워져 있다. 개석의 형태는 오각형으로 장축 320cm, 폭 296cm이며 두께는 98cm 정도 된다. 장축방향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방향과 동일하게 동서로 두고 있다. 3개의 지석이 보인다. 이 고인돌 주변지역에는 여러 기의 고인돌이 더 있었으나 92년에 경지정리사업을 실시하면서 모두 버렸다고 한다.
영조어필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544
시대 : 조선시대
영조께서 수졸제(군사) 김성갑에게 내린 어필_爾誰孫乎(네가 누구의 손자인고) 其何今登(그 어찌 이제 왔느냐)
화산영당
장수군 산서면 오메길 7-18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영당
이 영당에는 극복제 권집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권집의 영정은 원래 이 마을에 거주하는 안동 권씨의 종가에 있었는데, 화재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긴 후손들이 영당을 세워 영정을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이 영정각에는 많은 영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양재철효자려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312-2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효자려
남원 양씨이며, 문양공 양성지의 후예이다. 10세 전에 모친을 여의고 부친만을 모셨으나 가난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조석문안을 거르지 않았는데 부친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단지 수혈하여 며칠 연명하였으나 끝내 유명을 달리하자 남의 집 살이를 살면서도 성묘를 거르지 않았다. 1882년(고종 19년) 명정의 특전과 동몽교관의 증직이 내렸다.
번암면
장사명과진주소씨효자려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081-1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정려
구조 : 정면2칸, 측면2칸. 맞배지붕
장사명 그의 처 진주소씨를 위하여 세워진 정려로 장수에서 번암면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가 보면 노단리 입구의 도로변에 있다. 북쪽 벽면의 오른쪽에는 "효부숙인진주소씨지여"라 쓴 현판이 걸려있고, 왼쪽에는 "효자종통훈대부하선부감찰장사명지려"라 쓰여있는 현판이 걸려있다. 장사명은 숙부에게 입양되어 처와 함께 양부모를 친부모와 같이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비둘기가 약으로 좋다는 말을 듣고 구하려 하였으나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는데, 산비둘기 두 마리가 장씨의 품에 안기매 다려서 어머니에게 드리니 병이 완쾌됐다.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2칸 맞배집으로 되어있다.
장계면
삼봉리산성지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남산마을
구분 : 산성지
장계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국도 남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있다. 백화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육십령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장계천에 이르러 절벽을 이룬다. 성은 퇴뫼식 산성으로 시루봉이라고 불리는 남산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은 대부분이 무너졌고, 평면형태는 원형을 이루며, 성의 둘레는 340m이다. 산성의 남쪽부분은 성벽의 흔적이 14m 정도가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죽조방식은 외변을 약간씩 다듬은 할석을 가로방향으로 눕혀 쌓고 있으며, 산 경사면을 따라 내탁식으로 축조하였다.
명덕리산성지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시대 : 삼국시대
구분 : 산성지
이 성지는 남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험준한 준령이 전북과 경남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의 제일높은 봉우리인 해발 1026m 정상에 있다. 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8부 능선상에 폐광된
석회광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장계에서 거창으로 가는 국도가 지나는 육십령 고개가 있다. 그리고 정상에서 동서사면은 급경사를 이루는 절벽이며, 남북사면은 능선의 줄기가 계속되면서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이 산성은 봉우리의 정상부를 두르고 있는 테뫼식 석성으로 능선 사이에 100m 정도 성벽의 남아 있을 뿐이다. 명덕산성은 봉수대 역할도 한 듯 성지안 넓은 바위 위에 동서남북으로 4개의
불씨로인 듯한 구멍이 파져 있다.
대곡리산성지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구분 : 산성지
영취산(1075.6m)은 백두대간의 준령에 위치한 고봉들 중 하나이다. 바로 서쪽으로 장안산을 마주대하고 있으며 무령고개에서 등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400m 가량 올라가면 영취산 정상부에
다다른다. 영취산 정상부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준령에 자리한 고봉들과 육십령 혹은 중치가 내려다 보이며 멀리 가야산까지도 잘 조망된다. 서쪽으로는 장안산 봉수와 장수읍 일원이
내려다 보이며, 멀리 장수군과 진안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능선과 호남정맥의 준령도 시야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천왕봉까지 이어진 백두대간의 준령과 경남 함양군 일원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장계지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수락봉 봉수, 깃대봉 봉수가 시야에 들어온다.영취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크기 40~50cm의 할석을 이용하여 석축을 쌓았다. 현재는 서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이 구조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먼저 동쪽은 거의 무너져 엄청난 양의 석재가 경사면을 따라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석재의 일부는 등산객들에 의해 계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서쪽은 어느정도 형태를 유지하고 잇는 석축이 군데군데 남아있으며, 다듬지 않은 할석을 이용하여 조잡하게 쌓은 석벽이 5~6단 정도 남아있고, 잔존높이는 102cm이다 . 남쪽과
북쪽은 등산로로 인하여 대부분 경사면을 따라 무너졌다. 정상부를 중심으로 무너져 내린 석축의 둘레는 187.5m이다. 영취산의 정상부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측량용 표석과
백두대간 안내판, 그리고 영취산 표지 말목이 설치되어 있다. 자연적 유실로 인하여 자연 암반층이 곳곳에 드러나 보이며, 잡목과 낙엽이 두껍게 쌓여있다. 평탄한 지형을 이루는 정상부는
남북길이 18.7m, 동서폭 6.5m이다 .전체적으로 석축이 무너져있는 양상이어서 축성기법이나 석축과 관련된 여러가지 속성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정상부 남쪽에는 봉화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원형의 석렬이 존재한다.
옥천전형규효행실기
장수군 장계면 오동리 양천, 앞 내 건너 길가 산기슭
규모 : 석판 90·45
구조 : 석정 (돌담, 조석판)
고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모친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위태롭게 되자 자기의 살을 도려 약과 다려드려 병복케 하였다 하여 세상이 선생의 효심을 크게 칭송하였다.
효자이병학급배동내정씨효열실기
장수군 장계면 송천리 서변, 입구 길가 느티나무 아래
구분 : 정려비
규모 : 석판 92·43
구조 : 석정 (담장)
이병학은 도암(陶庵) 이경광 선생의 후예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인 운하(雲夏)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의 칭송이 자자하여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도 효는 물론 남편의 고질병에 허벅지의 살을 도려 치료하여 역시 포상을 받았다.
효부김해김씨지비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평지
구분 : 정려비
규모 : 석판 78·46·12
구조 : 석정(시멘트 담장)
부인은 김해 사람인 김중건의 여식으로 성산 사람인 이순영에게 출가했으나 남편이 타계하였다. 부인은 장님인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고 칠성당을 두어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다. 하늘의 도움인지 시어머니가 눈을 뜨게 되시고 여생을 맞았다.
동정대
장수군 장계면 금곡리 동정, 서쪽 장계천 북쪽 도로변
구분 : 정자
규모 :앞 2칸, 옆 2칸 (210, 215x185, 185)
구조 : 1941년. 목조누각,팔작지붕
도로 가의 벼랑 위에 서 있으며 상량문은 없다. 동정리 서문씨(西門氏)들의 정자로서 모두 6개의 현판이 있다. 그 중에 [동정대 이건기(動靜臺 移建記)]가 셋인데 봄에 쓴 것들이며, [동정대 서(動靜臺序)]는 정묘년 모춘(暮春)에 주인옹(主人翁) 서문신이 쓴 것이다.
육봉천, 육재중 효자려
장수군 장계면 무농리 원무농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정려
구조 : 정면2칸.측면1칸. 맞배지붕
원무농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나무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효자각의 오른쪽에는 "효자가선대부육재중지려"라 음각한 비석과 그 왼쪽에는 "효자통정대부육봉천지려"라 음각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옥천 육씨 전주파 육봉천은 효행이 많은 사람으로서 당시 부친의 병이 날로 위독하여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병의 차도가 없었다. 다행히 유명한 의원을 만나 진단한 결과 누에를 구하여 달여 먹으면 완치된다는 처방이 나왔는데, 불행히도 겨울철이라 구할 길이 막연하였다.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니 그의 갸륵한 정성에 감동, 소나무에서 누에를 구하여 부친의 병환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효자각을 세우고 육봉천을 추모하고 있다. 육재중은 육병천의 아들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역시 지극하였다고 한다.
탑동석탑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시대 : 고려시대
구분 : 석탑
현재 3층만 보존된 상태로 삼봉리 탐동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기단석은 최근에 시멘트로 만들었으며, 이 시멘트 기단석 위에는 자연석을 하나 올려놓고 이 자연석 위에 탑신이 아닌 석등의 하대석 받침으로 추정되는 석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 석재 위에는 하나의 석재를 이용하여 옥개받침과 옥개석을 조각한 정방형의 탑재를 올려놓았다. 2층의 탑신도 1층과 마찬가지로 석등의 하대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를 이용하여 그 위에 1층의 옥개석과 같은 형태의 탑재를 올려놓았다. 3층의 탑신도 1, 2층과 같은 형태의 석재를 이용 하였으며, 3층의 옥개석은 8각으로 되어있다. 이와 같이 이 석탑은 여섯 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한 것이다. 1, 2층의 옥개석은 하나의 탑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 되며, 나머지 1, 2, 3층의 탑신부에 이용된 석재는 최소한 2개 이상의 석등 석재를 이곳으로 옮겨 다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3층의 옥개석은 석등이나 부도탑에 이용되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다 현재의 탑을 조성할 때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탑의 석재들에 조각된 문양의 형태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촌리 당산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 입구
구분 : 당산
주촌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모시던 당산, 논개가 어린 시절에도 당산이 있었다고 전한다.
서문씨 굴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금곡리
시대 :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진사 서문표가 이 동굴을 의병 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왜병을 물리쳤다고 전해오는 동굴, 후세에 서문씨 굴로 됐다고 한다. 이 서문씨 굴 옆 동정대라는 글씨가 암벽에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조선 순조 때 명필이자 장수현감을 역임한 이의성이 쓴 것이다.
의암주논개생가지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구분 : 생가지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은 의암 주논개가 태어난 마을이다. 1574년 9월 3일의 4갑술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난 논개는 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 마을은 오동제에 수몰되고 남아있는 당산 옆에 생가만 복원되었다가 다시 1996~2000년도에 2만 평의 부지에 확장정화 하였으며 생가 2동 외에 기념관, 동상, 단아정, 부조, 인공 폭포 등이 있다.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왜장을 죽이고 순국한 주논개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군민들의 정성으로 1960년 건립하였다. 본래 이 비는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 입구에 있었으나 오동댐 건설로 수몰 지구 내에 있어서 1987년 생가지로 이전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의암논개낭생장지사적불망비" 라고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주논개의 생애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정면, 측면 모두 1칸으로 된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명덕산성불씨로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시대 : 삼국시대
명덕산성의 암석(岩石)위에 봉화로로 보이는 화로가 있는데 이 화로는 당시에 불씨를 보존하였으리라 생각되며 봉수(烽燧)에서 봉화를 올리면 법화 봉수, 주월 봉수, 진안 마이 봉수로 이어져 백제의 도읍지로 간 첫번째 봉화지로 보인다.
도암사
장수군 장계면 서변길 58-4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서원
도암서원은 장수군 장계면 송천리 서변마을에 있으며, 조선조 순조 15년(1815) 창건되었으나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1953년 복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도암사는 최근에 중수된 것으로 정면 3칸 .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도암사 정면에는 정면 3칸 . 측면 2칸으로 된 숭현재가 있다. 이 도암사에는 도암 이경광, 정숙공 분사 이성구, 강고 유심춘의 위패가 연벽으로 모셔져 있다.
천천면
연파정
장수군 천천면 오리골길 32-15
구분 : 정자
구조 : 목조팔작지붕
우서규가 작성한 연파정원기(原記) 기록으로 보아 1854년도에 단양우씨 문중의 효열 정신을 기리고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파정아래에는 구 연화분교 가 자리하고 그 옆으로는 금강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연화도수(蓮花渡水)라 하여 풍수설에 근거한 명당자리다. 구조는 목조 팔작지붕 기와형태로 「원기」, 「연파정중수 기」「찬양문」,「효자효열부」 현판 4개가 걸려 있다.
이임간유허비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반월길 4 (월곡리 월곡국도변)
구분 : 유허비
이임간의 호는 이헌, 본관은 장천이다. 그는 고려 충선왕 때 사람으로 당시 문하시중병장사를 역임하고, 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계북면 양악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이 비는 1987년 그의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장영손효자비
전북 장수군 천천면 장천로 834(월곡초등학교 안)
구분 : 효자비
장영손의 본관은 구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 부모의 상을 당하여 6년을 시묘하였는데, 그 때 손수 제물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시묘를 하는 동안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향당의 천거에 의해 명정의 은전을 입어 정려각이 세워졌으나 퇴락되어 지금은 정려각은 없고 그 자리에 비석만 세워져 있다.
연평리새터마을당집
장수군 천천면 천천북로 982-46(신기마을)
구분 : 당집
연평리 새터마을 당집은 마을을 수호해 주는 할머니 신을 모신 집이다. 옛날 이 마을 주위에는 옥토가 많이 있었으나 주변이 병풍처럼 암벽석산으로 둘려 있어 물을 대지 못해서 논농사를 지을 수 없었는데, 어느날 밤 마을노인의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더니 괭이를 주며 이걸로 석벽에 줄이 그어져 있는 곳을 파면 봇도랑이 될것이니 그 곳으로 물을 대서 농사를 지으면 풍작을 얻으리라 하며 사라졌는데 깨어보니 꿈이었다.아침에 동네사람들을 동원해서 현몽한 곳으로 가보니 줄을 그은 것 같은 지점을 파보니 암벽 사이에 흙이 있어 흙을 걷어내니 도랑이 되어 그 곳으로 물을 대서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농민들은 정갈한 곳에 당집을 짓고, 당할머니신에 햇곡식으로 고사를 하며 무슨일이든지 당할머니께 기원하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지금 당집은 훼철되고 터만 남았다.
김흘효자려
전북 장수군 천천면 장천로 1029-1(삼장입구마을)
시대 : 조선시대
구분 : 정려
구조 : 정면2칸.측면1칸, 맞매너와지붕
김흘은 함창인 판서 김남택의 후예이자 승지 우상의 현손, 은상의 아들이다. 김흘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아버지의 병환에는 똥을 먹어보면서 간병하였고, 어머니가 위독하매 손가락을 잘라 수혈, 회생하여 며칠간 연명시켰다. 숙종조에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명정의 특전을 내려 천천면 삼고리에 정려를 세웠다.
계남면
김해김씨효열비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630-3(중방)
구분 : 효열비
규모 : 비 132·45·21 (비갓)
부인은 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증(贈) 병조판서 모하당(慕夏堂) 김충선 장군의 9대손 김세원의 딸로 장성하여 문절공(文節公) 양사도의 후예 우재규식(愚齋圭植)에게 출가 90대의 시부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1891년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자신의 허벅지를 도려 회복케 하였다. 나라에서는 부인을 포상하고 후손들은 비석(碑石)을 세웠다.
충주박씨기행비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1013-85(계남 중학교 뒤 솔밭)
구분 : 기행비
규모 : 비 147·52·14
충주 박씨 기석의 딸로 연안 송인갑에게 출가하여 일제때 남편이 화태(樺太)(지금 사할린)로 끌려가는 바람에 홀로 자녀들을 키우던 중 1956년 홍수때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외아들을 구하고 타계하였다. 아들이 모친을 추모하는 비(碑)를 세웠다.
진양유씨효열비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1174
구분 : 효열비
규모 : 비 122·42·17
구조 : 석비각
부인은 진주유씨이며 수산후(壽山后) 학생(學生) 정석(禎錫)의 처(妻)이다. 자라나면서 재질이 과인하였고 자태가 아름답고 강상예절이 뚜렷하였다. 출가하여서 시부모의 환우에 머리를 베여서 팔고, 남의 고용살이를 하여 부양하였고, 남편이 병이나서 위태로워지자 단지(斷指)하여 선혈(鮮血)을 수혈, 며칠간 생명을 연장시켰다. 삼강(三綱)의 예행(禮行)을 다하였기 때문에 후일에 본군 유생들이 입비하였다.
벽남정
장수군 계남면 장안산로 63
시대 : 4378년 (1985년)
구분 : 정자
구조 : 목조 누각, 겹처마, 팔작 양철지붕
누각으로서 사방으로 돌아가면 난간이 있다. 정자 안에는 11개의 현판이 있는데 이 글들은 대개 을축년과 병인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풍욕정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647-6
시대 : 1962년
구분 : 정자
장계,계남면 유지 15명이 친목을 도모하고 시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1962년 건립(현판글씨 : 강암 송성용)
서산정씨지려
장수군 계남면 침곡리 1438-24
1643년(인조21년) 계미 6월 8일에 남편이(서문 배) 하인을 데리고 들에 나간 사이에 흉한이 침입해서 정씨의 손목을 잡으니 손목을 끊어 버리고 식음을 전폐한지 7일만에 목 매어 자살하였다.(1643. 6. 15) 이는 고 열부 왕응의처 이씨 와 다를 게 없는데 죽기까지 했으니 그 열에 감복하여 동년 8월1일 정려를 건립 세상에 본을 삼도록 하였다.
김남택신도비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757-3
구분 : 신도비
김남택의 자는 성수, 호는 손재 본관은 함창이다. 그는 고려말 공민왕 19년(1370) 현 계남면 침령마을에서 태중대부 원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그는 조선조에 들어와 세종조에 예조판서를 역임하다 아우 남중과 함께 경상도 하동으로 은퇴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세종 18년(1436) 죽었다. 이 신도비는 최근에 이르러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이동화·이정근부자효자려
장수군 계남면 가곡리
구분 : 정려
이동화는 성주인으로 고은 지활의 후예이자 전명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세상의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학식과 덕망을 겸했다. 조정에서는 이 효자에게 증직으로 "증사헌부감찰가선대부예조참판동질의금부사"의 벼슬을 내려 효성을 칭찬했다. 이정근은 이동화의 아들로 부모를 지성으로 1891년(고종 28년) 명정의 특전이 내려 계남면 곡리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부자효행을 칭송했다.
계북면
구암정
장수군 계북면 원촌리 1431(원촌교 밑 물가)
시대 : 1963년
구분 : 정자
규모 : 앞 3칸, 옆 2칸 (165, 165, 165x167, 167)
구조 : 우진각 함석 지붕, 홑처마
정자가 있는 곳은 계북면 원촌리이지만 내 건너 무주군 안성면 공지리 보안촌의 순천 박씨들이 세운 정자이다. [구암정] 현판 외에 모두 13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대개 시(詩), 운(韻), 서(序) 등이다. 옆에는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사인 순천 박노준 기념비(士人順天朴魯俊紀念碑)]와 6.25때 강원도 금화 전투에서 죽은 [병장 박춘봉의 충혼비]가 서 있다. 그리고 옆의 바위에는 구암대(龜巖臺) 석각이 있다.
풍욕대·사성정
장수군 계북면 월현로 82-7
구분 : 정자
계북면 월현리 장고개 마을밑 서쪽 기암(奇岩)에 각자(刻字)했으며 옆에선 노송(老松)은 명물(名物)이며 아래는 서방소와 각시소가 흐른다. 우재 이규상 (愚齋 李圭尙) 매촌 김홍기 (梅村 金洪基) 등 7명이 결사하여 음풍농월 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정인승생가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19
구분 : 생가
정인승 선생은 1935년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한글 큰사전 편찬과 학회기관지 [한글] 편집을 전담하면서 한글 운동을 통해 항일애국운동을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 옥고를 치렀으며, 우리의 얼.말.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문태서·박춘실 의병대장전적비
장수군 계북면 건재길 7
구분 : 전적비
문태서 호남의병대장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조인되자 덕유산을 거점으로 호남의병단을 결성하여 신출귀몰하는 병법으로 덕유산 일대에서 500여회 왜병을 섬멸하였고, 이원역 습격작전, 장수주둔 일본수비대 기습작전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고향 안의에서 왜병에 체포되었다가 경성형무소에서 34세로 옥사했다. 박춘실 호남의병선봉장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조인되자 의병 50여명을 이끌고 남덕유산에 들어가 토옥동 어구 양악에서 호남의병장 문태서장군과 호남의병단을 조직하고 장수, 무주, 진안, 안의, 함양, 거창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1913년 11월 토옥동 전투에서 결사항전했으나 일군에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 감옥을 부수고 동지 100여명을 탈옥시켜 투쟁케 하는 등 끝까지 굴하지 않다가 1914년 6월 3일 40세에 옥중에서 자결했다.
용연정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56-12
구분 : 정자
구조 : 정면3칸, 측면2칸. 팔작지붕. 겹처마
최근에 완공된 양악댐 바로 아래에 있는 것으로 옆에는 양악리 삼층석탑이 있다. 용연은 덕유산 계류가 흐르면서 층암을 타고 폭포를 이루고, 양변 절벽 아래 떨어져 소를 이루며, 이 소의 언덕 위에는 날아갈 듯 세워진 용연정이 있다. 이 곳은 양촌 정존성이 소요하던 곳으로 그의 손자 정기수가 용연정을 세웠다.연재 송병선 선생의 기문과 심석 최병심 선생의 제액이 벽면에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전면의 중앙칸에는 용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