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황희선생문집

魔村貴善先生支集 厖村貴善先生支葉刊行委員會

厖村黄喜先生文集 厖村貴喜先生文集刊行委員會

發刊辭 도덕대 文化라 하면 先賢이 이룩한 업적과 지혜를 기록 보존하고 언 그 위에서 發展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세계 민족 가져보지 못한 『王朝實錄』 이라는 日記體의 實際 記錄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그 귀중한 기록 속에 厖村 先祖에 대한 記事外 一 一五八건이나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본다. 너무나 厖大한 기록이고 광범위한 분야의 업적이기 때문이었을 뿐 厖村선생의 기록의 발굴 보전에 게을리 했던 것은 아니다. 옛부터 實記 二권이 전해 내려 왔음은 周知의 사실이나 十九세기에 들어와서도 黃毯.黃蘭善 黃心顯 · 黄正 淵·金勝鉉二 後孫 後學이 文集 遺跡 年譜 實記 등을 편찬 후세에 전하였다. 一九三四년에는 史學者 黄義敦 博士가 六년간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자료를 集大成하여 厖村先生文集을 완성하였다. 光復後 이 文集을 國譯하여 많은 사람에게 읽혀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 책의 내용이 歷代 最高 賢相에 관한 사항이며 글 쓴 이들이 當代의 名文家 들이고 쓰여있는 事實 또한 당시 정치 사회의 생생한 史實의 記錄인지라 함부 로 손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다행히 당대의 碩學이요 史學者인 學術院會長 1 李丙燾 博士의 협조로 申奭鎬 李崇寧 趙明基 韓沽励 5 저명 학자가 위원이 厖村先生文集 發刊辭

厖村先生文集 發刊辭 되고 國史編纂委員會 編史室長 李鉉淙박사가 번역을 맡아 一九八〇년 국역판 2 을 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宗會 형편상 少數限定版을 발간 배포하다보니 文集과 資料의 요구가 還至하나 이에 응하지 못하여 후손으로 東京都千代田区丸の内2-7-2 운 가 되었다 。 이에 長水黄氏大宗會에서는 작년 庚辰譜斗 동시에 여 배포하려 하였으나 불의의 사유로 그마저 미룰 수밖에 없는 를 가 당 이를 안타까이 여긴 宗中에서는 각파 대표로 구성된 문집 발간을 결의하므로써 補正版이 햇볕을 보게 되었다. 補正이란 말 뿐이다 o 前述한 名賢의 名文大家들이 대로 행적을 기술한 것이 고 翻譯까지도 當代 碩學의 所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쇄상의 誤脱字斗 古 語 死語化한 用語를 손질하였으며 古拙한 編輯方法이나 裝冊을 현대인의 취향 에 맞도록 노력하였을 뿐이다. 본래 남의 글을 손보는 것은 스스로 짓는 것 보다 어렵다 하거늘 전술한 바 와 같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 그 어려운 일을 차질 없이 해주신 義直 ·義屯 두 宗賢川 宗會 대표해서 특별히 敬意晨 表하며 아울러 이 사업이 有終의 美를 거두도록 物心兩面으로 도와주신 余宗 諸位 감사드리며 까다로운 文券을 瑕 疵없이 出版해 주신 回想社 朴泓九 社長님과 全社員에게 감사드린다. 二〇〇一年 辛巳 八月 日 長水黄氏大宗會 會長 任周

刊行辭 厖村 黃喜 정승은 朝鮮 建國後 우리 國力이 크게 발전하던 世宗時代의 名宰 相으로 國王을 보필하면서 民衆生活의 向上發展에 온갖 힘을 기우린 清白吏 당 太祖때부터 定宗· 太宗을 거쳐 世宗때에 이르기까지 四代王을 거치는 동 안 九十平生生 台灣檜木精油 官職生活 七十四年의 기록적인 奉職生活 最高官職 인 領議政으로서 찬란한 世宗時代를 이룩케하는데 있어서 中樞的 수행하여 o 인 役割을 나갔다 厖村先生은 六曹判書い 거쳐 領議政에 이르기까지 内外의 要職을 돌파다 거치 면서 보여준 行政力의 발휘는 물론이요 先生의 建議 아님이 없을 정도 많고 다양하다. 그런 속에서도 民眾生活을 돌보는 정신과 행동을 잊지 않았으며 진 정한 牧民官으로서 養民에 最善을 다한 것이다. 厖村先生은 貴賤을 가리지 않고 生命의 귀중함을 잊지 않았다. 才能이 있으 면 그것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주었으며 人間의 生命力의 존귀함을 몸소 보여 주기도 하였다. 딱딱한 權力 속에서도 많은 逸話를 남겼으며 그것은 단순한 逸話外 아니라 오히려 삶의 教訓으로 삼게 하는데서 生前에 보여준 先生의 고 결한 人間像을 엿볼수가 잇는 것이다. 3 이처럼 公私間에 다양하게 國家에 奉仕活動한 厖村先生의 業績에 대하여 일 厖村先生文集 刊行辭

厖村先生文集 刊行辭 4 찌기黄義敦박사가 朝鮮王朝實錄을 바탕으로 各種文獻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수집하여 이룩한 本文集은 어느모로 보나 정확하고 内容이 풍부한 알찬 것이 라 믿는 바이다. 이제 本文集을 통해서 朝鮮王朝 建國初期인 世宗時代의 理解는 물론 우리 歷史를 理解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번에 國史 編纂委員會 李鉉淙博士에 의하여 번역 출간케 되었음은 참으로 기쁜 일이며 누구나 쉽게 읽고서 國家斗 民族과 文化의 발전에 獻身奉仕하는 거룩한 정신 을 계승 발전시킨다면 더욱 빛나는 教訓이 되리라 믿는 바이다. 一九八〇年三月 日 厖村 黃喜先生 文集刊行委員會委員長 學術院會長.文學博士 李丙燾

序文 厖村 黄喜 先祖의 文集은 元來「厖村集」十一卷이 있었으나 長久한 歲月이 흘러가는 동안 逸失되어 現在로서는 傳來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一八四八年 에 承旨公 黄荻(く入りませ入 七八オ)이 先生의 遺蹟에 관한 各種 資料를 蒐集整理計 여 「 眉村先生遺蹟」 一卷을 發刊하였고 이어서 一八九六年 儒學者 黄公 蘭善 과 黄公 心顯에 의하여 「厖村年譜」 一卷이 發刊되었으며, 一九二五年 儒林의 金公 勝鉉과 宗孫 黄公 正淵에 의하여 「厖村先生實記」 二卷이 發刊되었다. 다 시 一九三四年에 歷史家 黄義敦 博士가 史學的인 立場에서 朝鮮王朝實錄斗 그 밖에 各種資料를 再蒐集 補完하여 「 彪村先生文集 」 十四卷 七冊을 發刊하였다. 이 文集은 博士가 前後數回에 걸쳐 補完된 資料得 土台로 다시 史學的인 立 場에서 六年의 긴 歲月을 専念하여 完成한 것이다. 祖國光復以來이 文集에 관하여 史學界斗 宗門内에서 國譯版을 發刊해야 한다는 舉論이 여러번 제기되었다. 그러던 중 最近에 이르러 厖村先生銅像의 建立과 關聯하여 宗會 組織改編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文集發刊問題斗 다시 舉論되어 發刊準備를 하게 되었는데 二中 國譯 國史編纂委員會의 編史室長 인 李鉉院 博士의 責任下에 翻譯引로 했고 그 밖에 關聯된 여러 作業을 進行 하여 왔다. 5 이러한 過程에서 厖村先生의 文集은 그 史學的 價值斗 規模 内容 등으로 봐 厖村先生文集 序文

厖村先生文集 序文 서 史學界外 中心이 되어 發刊해야 한다는 問題가 舉論되어 史學界의 元老이 6 신 學術院會長 李丙燾 博士와 相議한 끝에 李博士가 中心이 되어 「 厄村黄喜先 生文集刊行委員會」를 構成키로 하고 委員長에는 李丙燾 博士를 推戴하였으며, 委員에는 前 嶺南大学校 大学院院長이叫 現在 學術院會員 申奭鎬 博士、 韓 國精神文化院 副院長 李崇寧 博士、 前 東國大學校 總長이며 現在 同校 名譽 教授 趙明基博士、 前 서울大學校 大学院院長이미 現在 學術院會員 韓沽 欣博士、 그리고 李鉉淙 博士를 모시게 되었고 그 밖에 宗門内에서 數名이 指名되어 同 委員會를 補助키로 하였다. 그후, 各 委員께서 數次의 모임을 갖고 文集의 體制 内容의 修正 補完 등의 審議를 하였고 특히 委員長께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큰 도움을 주셨다. 이리하여 오랜 宿願이던 厖村先祖의 文集이 史學界의 名士들에 의하여 國譯 版으로 發刊하게 o 本人은 宗門을 代表하여 委員長 李丙燾 된 것이다 여기에 博士와 委員 여러분께 真心으로 感謝屋 드리는 바이다. 끝으로 文集發刊에 所要되는 모든 經費를 負擔訓 준 黃七星氏 黄昌浩氏黄 信夏氏에게 宗門의 이름으로 感謝를 드리고 發刊實務에 心血을 다한 黄能顯氏 와 黄道淵 遞信部 經理局長의 勞苦屋 致賀하며 譜典出版社 李相洙 社長과 그 밖에 本事業에 協助해 준 여러분께 深深証 感謝를 드리는 바이다. 一九八〇年 三月 日 長水黄氏大宗會 會長 黄弼周

번역을 마치면서 우리 歷史에서 가장 名宰相으로 알려진 분이 바로 翼成公 黄喜정승이다. 九 十平生의 生涯에서 七四年間의 官職生活은 어느면으로 보나 記錄的인 것이다. 세번에 걸친 吏曹 禮曹判書、 두전의 刑曹判書 그리고 兵曹 戸曹 工曹判書い 거치며 六曹에서 庶政을 담당하였다. 그러면서도 大司憲 觀察使、 漢城判尹、 議政府 贊成事局 거쳐 六四歲에 右議政、 六五歲에 左議政 六九歲에 領議政 七 十蔵에 領議政府事로서 八七歲에 致仕할때까지의 官職은 内外의 要職을 거의 다 거치다싶이 하였다. 二十四年間의 宰相職 그 중에서도 領議政 재직이 十九年間이나 되었으니 그 사이에 쌓아올린 경륜은 領議政으로서 國力伸長에 유감없이 발휘하여 世宗時 代을 이룩하는 中極的인 역활을 하였으며 内治外交面에서 進取斗 금융산업은행 民族 史를 구현하였는바 이는 翼成公 溫厚하고도 고결한 人間像의 이 룩된 것이다. 男女老少斗 上下貴賤을 가리지 않고 公私가 分明한 田口 尋平 安田純 民하는 것을 政教의 基本을 삼아 이끌어 갔으며 人間尊重의 정신 은 清白吏로서 公職者가 받을 수 있는 영예를 받은 것이다. おおきに まいど 잘 못 보게 外 剛으로 일관했던 生涯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逸話을 남겨 은 단순한 逸話外 아니라 人生을 生活面에서는 오히려 마음의 7 한 政治權力의 질서를 슬기롭게 調和시키면서 부드럽게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厖村先生文集 刊行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