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산장군의 구국항일투쟁기

大東倡義湖南同義團 芝海山将軍의 救國抗日闘争記 장수문화원

題字:김진돈(전라금석문연구회장)

芝海山将軍用 救國抗日闘事記 長水文化院

上一徳 可美道名和婦 新北市多元"X 將軍 尊影 全海山

大東倡義·湖南同義團 《至海山将軍副救救抗日闘争記》 내면서 고두영 장수문화원장 해산(海山)은 그의 호이고 이름은 기흥(基弘)이며 자는 수용(垂윷)이 고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해산은 1879년 10월 18일(고종 16) 아버지 병국((사)과 어머니 경 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지금의 전북 임실군 둔남면 국 평리 고전동(孤田洞)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릴 적 생계를 찾아 종형 이 살고 있는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원촌마을로 이사를 했다. 천안 전씨의 시조(始祖) 섭(표)은 백제시조 온조왕 때 환성군이었고 중시조 낙()은 고려 개국 공신으로 천안 부원군이었다. 조선조에 들 어 호조판서를 지낸 후손 극례(克禮)는 단종(계급)폐위 사건으로 두 아 들 자온(自温)과 자양(自讓)이 모두 화를 입자 서울을 버리고 전북 진 안(鎮安) 강창(IT)으로 은거하였는데 그가 곧 해산의 14대조이다. 그 4 전해산 장군의 항일투쟁실기

로부터 극례의 후손은 진안에서 번창하여 그 고을의 호족이 되었다. 해산의 아버지는 시골 선비로서 해산이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함 을 보고 일찍이 성리학자이신 당천(唐川) 이한룡(李漢龍) 선생을 찾아 가 문하에 들게 하였다. 그는 입학 후 글공부에 힘쓰며 스스로 공부하 는 방법을 터득하여 스승의 가르침에 앞서 학문의 문리를 깨우쳤고 또 한 서법에 있어서도 필재(筆才)가 뛰어나 서예가 출중하였다. 점차 나 이가 들며 경적(經籍)을 널리 섭렵하였으며 특히 공자, 맹자, 주자 등 의 학문에 접어드는 한편 구국란사(救國亂史)와 함사(函)번)를 탐독하 며 부지부식간에 애국적인 지사로서의 소양을 터득하여 그가 뒷날 의 병장으로 활약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으면서 조선의 현실이 마치 전국시대와 같이 흡사하여 나라가 어지 럽고 힘이 없으며 역신들이 사리사욕에 날뛰고 시리에 영합하는 정경 을 한탄하였으며 국란 극복의 정신이 싹텄던 것이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는 1905년 (光武 9)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1907년에 군대까지 해산을 시키고 우리 의 주권을 강탈하여 갔다. 이를 보고 그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사방에 뜻이 있어 앞으로 바다를 건너 천하의 대세를 널리 살피려 하였는데 침 략을 당하였으며, 을사에 이르러서는 왜적과 친일 5적이 임금을 협박 하여 5조약을 맺어 우리의 정권과 3천리 강토의 오천년 역사가 말살당 하고, 오랑캐와 같이 짐승의 나라가 되었구나." 하며 한탄을 하였다. 날로 일제의 침략이 심해지자 면암(勉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을 5

사늑약에 반대하여 호남에서 거의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순절하였다. 전해산은 나라가 망해 가는 것 을 보고 밤낮으로 통분하였다. 그러다 마침 임실의 정재( 이석용 (李錫庸)과 항일 투쟁을 할 것을 다짐하고 1907년 가을에 의병을 일으 켰다. 이때 둘이서 조직한 창의동맹단(倡義同盟44)의 부서는 다음과 같다. 대장 이석용(李錫대) 선봉 박만화(朴萬華) 최덕일(崔德逸) 송판구(宋刋九) 중군 김사범(金士範) 윤명선(尹明善) 김성학(金成鶴) 여운서(呂運瑞) 김운서(金雲瑞) 김성학(金成學) 참모 전해산(全海山) 한사국(韓) 이광삼(李光三) 총지휘 임갑천(林甲川) 곽자의(郭子儀) 박종문(朴宗文) 연락 홍윤무(洪允武) 박성무(朴成武) 윤병준(尹乗俊) 도로부장 김사원(金士元) 김공실(金公實) 김성율(金成標) 보급 한규정(韓 井) 박금동(朴숙東) 박문국(朴文局) 군량 오기렬(吳琦烈) 조영국(趙學國) 김학문(金學文) 이 조직은 1907년 8월부터 1908년 3월 남원의 사촌 전투에서 일본 군에게 패할 때까지 유지되었는데 남원 임실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군 에게 유격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사촌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6 전해산장군의 구국항일투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