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유헌집

陽宋天子書至 前軒先生丁志籣公事末當不 原家公 士林領袖首被極典於是忠藺與李海底 時事者莫不脾寒氣塞况其親子乎忠簡之子諱至 국역유헌집 不文辭謹按狀昌原之 時事者皆 武汉其親子平息藺之子 走安省十有 道變於巨濟鵬會號哋 盖震制之 況忍痛治喪倫約迓 整樹 국백 盟察出監和順長水 银联 塑在元堂里乙之原 有膽百世細感者不以不支解謹按狀 喜充喝可案觀也曾祖諱暉典性署主簿 장수문화원

국역 유현집 장수문화원

國譯 游軒集

책을 펴내며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충절이신 백장 선생(1342~1418)과 황희 정승(1363~1452)에 의해 지 역학문의 터전을 닦고 "인심고박(人心古朴)과 태고순풍(太古淳風)"을 꽃피운 장수는 그 후로 도 많은 학자들과 의리의 인물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다. 조선중기의 유헌(游軒) 정황(1512~1560) 선생은 뇌계(雷溪) 유호인(俞好仁) 선생(1445~ 1494, 창계서원에 배향)과 함께 장수가 자랑하는 조선의 대표적 문신이자 문장가이다. 선생의 관향은 창원(昌原)이며 자는 계획(조명), 호를 유현(카F)이라 하였고 1512년(중종 7년) 장수의 산서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효행과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 유헌 선생은 중종과 인종의 사이에서 기묘(1519년, 중종 14년)와 을사사화(1545 명종 즉위), 정미사화(1547년, 명종 2년)를 겪었던 시대에 성장하였다. 유헌 선생은 정암 조광조에게서 수 학하였고, 기묘사화로 스승을 잃은 뒤인 1536년(중종 31년)에 4명만을 뽑는 친시(親 왕이 직접 급제자 선방)에 합격하여 사간원정언(司 사현부지평(司憲府持平), 병조·형조 정랑(兵曹刑曹正郎), 교서관교리 겸 춘추관기주관(春秋節記住官)。| 되었으며,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한 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국장(國쇽)의 예월(禮月, 천자는 일곱 달, 제 후는 다섯 달 선비는 한 달)을 지키지 않고 갈장(渴葬, 예월을 지키지 않고 급히 장사지냄)으 로 치르려 하자, 정황 선생이 이를 반대하며 의례대로 장사를 거행하게 하였고, 급기야 양재 역벽서 사건으로 곤양에 유배(1547년)되었으며 다시 거제도로 이배(1548년)되었다.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부훤록》, 《장행통고》, 《유헌집》을 남겼 고 1560년(명종 15년) 7월 6일 49세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고두영 장수문화원장 유헌의 충직에 선조대왕 때 율곡 이이 선생이 상소하여 관작이 복원(1570년)되었고, 1619 년(광해 11년) 유림들의 상소에 의하여 임실의 영천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에 증직되었다. 숙종 34년(1708년)에 좌의정 이유(수)의 상소로 '예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유해는 산서면 봉서리 원당곡에 안장되어 있고 묘갈명은 송시열(宋時刻) 선생이 지었으며 산소와 멀지 않은 곳에 신도비(1743년, 영종 19년, 시도유형문화제 제202호)가 세워졌다. 유헌 선생은 정암 선생께 수학하였고 퇴계 선생과도 많은 사상적 교류를 하였으며, 삼재(三 才)의 철학은 물론 중국의 역사와 학문마저 꿰뚫고 있었던 인물로 확고한 덕성과 온축에서 나온 문장은 볼수록 높아 보였다. 이번 번역으로 누구라도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충효가 바탕으로 된 덕성과 질박하면서도 저절로 향기가 묻어나는 도를 실은 문장을 살펴 본받고 배우며 기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어찌 우리 지역의 경사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번역에 고심하신 이정자 허만수 두 선생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또한, 《국역 유헌집》의 번역, 발간을 위하여 애써주신 장재영 군수님, 김홍기 의장님, 유 헌선생 15대손 정상윤님과 관계하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장수의 또 다른 표상 으로서 내일을 창조하는 자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또한 이 책을 계기로 더욱 보완하고 발 전된 또 다른 사료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2008.5.

유헌 너転 정황T 선생 관련유적 유헌 정황 선생과 관련된 유적은 산서면 사계리, 하월리, 봉서리 일대에 창원정씨 종가, 유 헌 선생 묘소 및 신도비, 후손들의 묘소와 사당, 제각 등이 남아 있다. 다만 거제도에 유배된 기간 중의 흔적은 밝혀진 바 없으며, 정확한 유배지역 역시 선생의 시문에 나타나는 거제도의 계룡산 부근으로 추측되고 있다. 1. 창원정씨 종가 창원정씨 종가(민속자료 제34호. 1999) 위치 : 전북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551번지, 묘소에서 2km 서북쪽에 위치한다. 내용 : 창원정씨는 고려시대 정연방(丁衍邦)이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車)로 영천군(寧川君)에 봉군된 이릉간(李凌갸)의 여식과 결혼하면서 영천군의 봉토 를 이양받아 장수로 이주하게 되었으니 700여 년 전이며, 유헌 선생을 모신 영 천서원(寧川書院)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현재의 종가는 팔작지붕 형태로 안채와 행랑체가 1854년, 사랑채와 대문이 1927년 에 지어졌으며, 부근의 정상윤 가옥(문화재 자료 119호 1984)과 200여 미터 떨어진 곳의 정자와 어울린다.

2. 유헌 정황 선생 묘소 정황 선생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는 정씨문중의 제각을 사이에 두고 있다. 묘소는 제각의 좌측 언덕에 있으며 우측 평탄한 곳에는 효릉참봉(孝陵参奉) 지낸, 유헌 선생의 5대손 유계 (幽溪) 정재흥(丁載興)의 유계영당(幽) 함께 10여 미터 사이를 두고 신도비가 있다. 유헌 정황선생의 묘소 위치 : 산서면 봉서리 산 내용 : 묘소의 좌 · 우측에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쏜石)이 있으며 주변으로 4개의 차양석(通陽石)이 있다. 묘사(홈런)에는 유헌 선생의 10마지기 논에서 나온 곡물 로 떡 3말과 소머리, 돼지고기 등을 준비하였으며, 이곳에 차양을 치고 음복 후 점심까지 해결하였다고 전하니 묘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묘소 아래쪽으로는 아들 정지(丁至)와 손부( 묘가 자리하고 있으 며 옆으로 부친인 정세명(丁世明) 선생의 묘소가 있다. 주변에는 증조할아버지와 재종(再從) 묘가 있으며 특히 증조할아버지의 묘에는 좌측으로 석등이 있고 우 측에 문인석이 있는데 문인석의 상부가 좁고 하부가 넓은 특징을 갖고 있다.

3. 신도비(神道碑) 신도비(지방유형 202호 2004) 위치 : 산서면 봉서리 산 12 내용: 신도비란 죽은 이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정황 선생 신도비의 비신은 195(82x29cm)이고 지대석 40, 귀부받침 58, 귀부 82. 이수 160cm로 총 높이가 535cm이다. 지대석은 4매를 갖추었고 귀부 받침은 1매이며, 사방에 연 화문을 양각으로 새겼고 귀부의 귀두는 아직도 섬세하게 확인되나 귀갑문은 선명하지 않다. 비신은 각섬석(곱돌)으로 만들어졌으며 잘 연마되어 있고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석의 머릿돌은 2마리의 반룡이 새겨져 있고 비교적 높은 보주 장식이 있다. 신도비 주변에는 왕벚꽃나무 3그루가 있다.

4. 영천서원(寧川書院) 宣腸 院書川寧 丙寅五月日 영천서원(문화재자료 제20호 1984) 위치 : 전북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203, 행정구역으로는 임실에 속하나 산서면 사계리와 인접해 있고 종가가 있는 곳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내용: 이 서원은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희생된 안채순(安處)을 비롯하여 유헌 선 생의 형인 정환(JJ), 정황( J J ) 이대유(李大甹)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영천서원은 광해군 11년(1619)에 세웠으며 숙종 12년(1686)에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 되었다. 고종 5년(1868)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 로 철거되었다가 후에 후손들이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두리기둥에 맞배지붕이며, 근처 30여 개의 서원 중에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뛰어난 학자들이 몰려왔다고 전한다. 사당 앞에는 강 당이 있고 옆으로 원장실 및 관리사가 있다.